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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Sep 02. 2024

나의 사랑하는 부산_03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처음 갔을 때도 그렇고, 한창 부산에 다니던 초반은 거의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자연스레 '동부산종합버스터미널', 즉 '노포터미널'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반추해 보면 내게 부산!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인 '레트로(Retro:복고풍의)'라는 키워드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게 바로 이곳인 것 같다. 금정산의 울창한 삼림을 배경으로 부산 입성을 알리는 고속도로와 철로가 인접해 있어 맑은 공기와 분주함, 편의성을 동시에 지닌다. 건물이나 주변 인프라 컨디션들은 대부분 낡고 예스러워 음침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깨끗하고 편리하며 생기가 넘친다. 이게 바로, 부산 그 자체가 아닐까?


늙을 노(老)에 채마밭 포(圃)를 쓴다. 워낙 비옥한 땅으로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라 그렇게 이름 붙였다 한다.

쭉 동래부(현 부산 지역의 옛 지명) 소속이었고,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 일대가 모두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면서 부산의 지역구가 되었다. 다만 중간에(1988년) 동래구에서 금정구로 관할이 바뀌고, 10년 뒤 노포동과 청룡동이 통합되면서 현재는 '청룡노포동(ㄷㄷ)'이라는 어마무시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이 부근을 옛 지명이었던 '팔송(八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 한성부판윤을 지낸 박내정이 동래부 동쪽 성내2리에 있던 '읍승정(동래부 무사들이 건립. 현재는 없음)'을 노래한 한시에서 팔송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이 일대를 동래구 팔송동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까지 팔송사거리, 팔송로와 같은 도로명, 음식점 이름, 은행 지점명 등에 그 전통을 남겼다.

금정산 기슭과 경남 양산 군지산의 정기를 더해 동쪽으로 선두구동 외곽을 따라 흐르는 수영강 줄기까지가 바로 '노포동'이다. 부산 최북단으로 개발이 제한된 지역이라 인구도 거의 없고 존재감도 미미하며 차량기지로서의 기능만 있는 곳이었으나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이 이곳으로 이전하며 활발해졌다. 시외버스뿐만 아니라 시내버스 및 인근 지역으로 이동하는 좌석버스 등의 집결지이기도 하고, 부산 1호선의 시발점인지라 늘 들썩들썩 부산(?)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에게 '노포동'은 곧 '동부산종합버스터미널'로 인식된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노포터미널'은 내게 부산 그 자체다. 장장 5시간 여의 버스 탑승으로 답답했던 속을 탁 트이게 만드는 넓은 실내엔 오래된 건물 특유의 시골(?) 냄새와 은은한 풀내음이 뒤섞여 있다. 작열하는 햇볕으로 살균이 잘 되어서인지 깔끔하게 건조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승하차장이 지하에 있어 전철이나 버스, 렌터카 등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1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에스컬레이터가 한쪽 끝에 있기 때문에 꽤 걸어야 한다. 실제 걷는 길이가 긴 편도 아닌데 괜스레 설레 더 길게 느껴지고 특유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구석구석 꼼꼼하게 눈에 담았던 기억이 난다. 증폭된 설렘을 안고 1층에 올라가면 정겨운 대합실과 매표소, 노포역 연결통로가 나오는데, 곳곳에 노점상과 매점들이 여행지의 기분을 물씬 느끼게 해 준다.

소소한 대리석 광장을 내려오면 왼편으로 노포역 입구와 시내·외 버스 종점이 있어 내륙으로 움직이기 더없이 간편하고, 안쪽 주차장에 주차된 렌터카를 찾아 곧바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하다. 금방 어디든 갈 수 있는 고속화도로가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큰길이고 건너편 단층 건물엔 다양한 스포츠웨어 매장과 화훼단지가 늘어서 있다. 근래 들어서는 잘 가지 않는 곳이지만 부산의 첫인상으로써 혼잡한 부산역보다, 분주한 김해공항보다 더 설레는 장소이다. 여기에 다 있다. 부산이.


연애 초반, 두근거림과 열정으로 가득하던 그때, 터미널 앞 그 대로변에서 항상 그 사람을 만났다. 준법정신 투철했던 그는, 주정차 단속 구역이기도 하지만 이동 차량에 민폐가 될까 우려하여 주변을 빙빙 돌다 딱 맞춰서 그곳에 왔다. 차에 타면 활짝 웃는 얼굴과 코튼향의 방향제 냄새가 가장 먼저 나를 반기곤 했다.

한 날은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 출발시간에 약간 밭게 이동한 적이 있었다. 데이트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연애 첫 해 여름날이었다. 혹여나 늦어 막차를 놓칠세라 교통 법규는 엄수하면서도 골목골목을 누비며 가까스로, 화장실 들릴 시간까지 염두에 두고 데려다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남자 믿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뭐 항간에 떠도는 부산 택시기사님들의 드라이빙 에피소드들을 생각하면 지역색인 것 같기도 하지만.


노포에서 내리고 타다 보니 인근 명소들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다.

가장 많이 갔던 곳이 '스포원파크'다. 현재도 시즌마다 운영 중인 경륜장과 스포츠센터, 개인·단체가 예약만 하면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코트, 꽃과 나무로 아름답게 조경된 수변광장은 물론, 키즈랜드와 주차장까지 겸비해 있어 가족이나 연인, 친구끼리 방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줄곧 집으로 가기 전 들렀던 터라 주차장을 벗어나면 곧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니 내겐 행복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조마조마한 장소다.

금정산 중턱에 있는 '범어사'는 무려 신라 문무왕(678년) 때 지어진 사찰로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힌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고풍스러운 한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사찰 관광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곳은 규모도 크고 방문객이 많아 한적함은 없다. 반면 화려한 사찰로서의 위엄을 목도할 수 있어 나름의 매력이 있다. 도로가 잘 깔려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인기인데 아마도 곳곳에 감각적인 분위기의 카페들이 많아서 인 것 같다. 그 사람의 대학 후배가 직접 운영하는, 당시 꽤나 입소문이 난 카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커피 맛은 기억이 안 난다.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정신이 없었는데 그 이유가 커피 때문인지 그 사람 때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노포동은 아니지만 근처 두구동 '연꽃소류지'도 여름의 어느 간격으로 남아있다. 너른 연못 가득 연꽃이 만발해 있고 잘 닦인 데크가 곳곳을 가로지른다. 그늘 하나 없이 뙤약볕 가득했지만 손 잡고 오붓하게 걸었던 그때의 기억 덕택에,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여름을, 동남아를 방불케 하는 근래의 더위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먼저인지 이젠 잘 모르겠다. 부산을 좋아해서 그 사람과의 사랑이 더 찬란했던 건지, 그 사람과의 연애가 좋아 부산이 애틋한 건지. 어쨌든 부산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계기가 무엇이든 진짜라는 거,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앞으로 나의 부산 사랑이 어떤 콘텐츠로든 무한하게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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