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을 싸는 일상

런치 박스 안 작은 세상

by 요비
요새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도시락 만들기다.
원래부터 요리를 꽤 좋아하고, 예쁜 플레이팅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던 터였다.


언제부턴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도시락을 싸는 사람들의 영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시락은 보통 아이를 둔 주부가 싸는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직장인이나 학생 도시락 영상이 많아서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아마 고물가가 지속되면서 매일 나가는 점심 고정 식대에 부담을 느낀 이들이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 여파 같았다.


아이를 위해 영양가와 양을 고려하는 실용주의적 도시락과 달리, '이왕 도시락을 싸서 먹는 거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보이는 도시락 싸기는 보기에 재미있었다. 이런 저런 귀여운 도시락통에 불닭이니 로제떡볶이니 하는 것까지 담는 요즘 도시락이라니. 어느 순간 중독돼서 매일 유튜브로 도시락 영상을 보다가, 간혹 집에서 싸보기도 했다.


이번 학기 학교에서 야간 근무를 하게 되면서, 도시락을 '싸야만 하는' 계기가 생겨 기뻤다. 게다가 마침 예정되어있던 일본 방문을 하게 되면서, 도시락 용품을 이것 저것 사올 수 있었다. 엄청나게 본격적으로 할 것 처럼 이것저것 신나서 사들였지만, 당초에는 도시락 싸는 시간을 30분 이내로 하는 것이 목표였다. 대충 편의점에서 사먹는 것보다 도시락을 먹는 것이 건강에나 지갑 사정에나 좋기 때문에 즐겁게 하되, 본업도 아닌 도시락 만들기에 너무 공을 들이는 것은 어딘가 생활에서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다가 만들어보고 싶은 메뉴가 늘어나면서(대표적으로 튀김류 같은 것...) 시간을 좀 더 쓰게 되었고, '도시락 만들기'를 내 자아실현의 다른 방식인 취미로 생각하게 되자 뭐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1시간을 걸려서 싸도 먹는 데는 20-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도시락을 '만드는' 행위이지 '먹는' 행위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도시락을 싸는 날(야간 근무하는 날)이 되면, 아침에 일어나서 몸단장을 하고 도시락 작업에 돌입한다. 가장 메인이 되는 반찬(지금까지 했던 건 닭꼬치 소금구이, 치킨난방, 카라아게, 브로콜리비프, 함바그, 피망니쿠즈메 등등)을 만들고, 서브가 될 것은 미리 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것(나물, 볶음 멸치 등)을 꺼내거나 간단히 만든다(계란말이나 샐러드 등). 밥을 담고, 구획할 용기를 넣거나 브로콜리/상추 등으로 칸을 만든 뒤 반찬 배치를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쌓아 넣는다. 다 되면 인증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SNS 등에 게시하고 반응을 보면서 즐거움을 누린다. 끝.


이 일련의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이 온도가 맞았나 싶은 기름에 반신반의하며 반죽을 넣었더니 치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떠오른다든지, 어제 만들어서 하루 숙성된 타르타르 소스 맛을 보니 어제보다 훨씬 맛이 좋다든지, 아! 저번에 만들어 두었던 채소구이에 올리브유와 조미료로 간을 하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해서 시도하고 성공한다든지...


BF93B84B-4227-400E-B687-EBD8ED4C32C0.jpg 제일 처음으로 쌌던 도시락: 밥, 소고기 브로콜리 볶음(굴소스 양념), 푸타네스카 파스타(전날 먹고 남은 것), 샐러드



도시락을 만드는 일은, 어딘가 작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닮았다.

얼마 전에 수업에서 읽은 인류학자 Allison의 일본 도시락 연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 엄마들이 유치원 자녀의 손에 매일 아침 들려서 보내는 도시락 안에는 일본 근대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는, 어딘지 살짝 비약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내용. 우선 자연의 재료를 주어진 틀 안에 맞추어 넣기 위해서, 재료를 다듬고, 자르고, 모양 내어서 용기 안에 조화롭게 집어넣는 행위. 이때 용기 안은 머핀 케이스 같은 것으로 구획되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통' 안에 이들을 집어넣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한다. 이는 자연을 다스리는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하는 행위 양식을 담고있다. 엄마는 아침마다 상당한 무급 재생산 노동을 통해 도시락을 만들면, 아이는 그것을 '규격에 맞춘' 가방 안에 담아 학교에 들고 가서, 다른 모두와 함께 선생님의 감독 하에 '시간 내에 남기지 않고 먹는 법'을 훈련받는다. 도시락이라는 사소한 물건은, 사실 근대 일본 국가가 여성 재생산 노동자와 미래의 노동자를 동시에 규율하고 훈련하는 기제인 것이다.


흥미로운 연구였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일본 유치원 아이들의 도시락은, 그 엄마에게 있어서 '싸지 않으면 안되는', 즉 어느 정도 강제성을 동반하는 행위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나같은 개인이 싸는 도시락은 느낌이 또 다른 것 같다. 어느 정도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수업에서 같은 주차에 읽은 연구 중에... 주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자기 수양으로서의 음식 습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다. 도시락 만들기는 어떻게 보면 '자기 수양'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수양'이라고 해서 뭐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IMG_1823.jpeg 도쿄에서 사 온 도시락통! 나무 도시락통처럼 생겼는데 전자레인지에 돌릴 수 있어 편리하다. 내용물은 밥 위에 표고버섯과 유부 간장 조림을 올린 것과 미니 닭꼬치, 그리고 과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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