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정의하기 2/2
이 글은 이전 글인 '허구의 대상을 소유하기'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2)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에 호소하며
4) 허구 그 자체에서 성적 대상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오타쿠 정의하기의 일환으로 쓴 이전 글에서, 오타쿠란 단순히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서브 컬처 콘텐츠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닌, '허구 대상에 대한 허구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허구화된 대상을 소유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아니 도대체 한 문장에서 '허구'라는 말이 몇 번을 등장하는 거야? (이전 글을 읽지 않고 여기로 왔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흥미가 생긴다면 이전 글 일독을 권한다) 생각해 보면, 오타쿠의 유별난 허구 친화력은 종종 이들이 주류 사회로부터 편견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현실 세계가 허구 세계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허구적 존재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돈을 쏟으며 몰두하는 오타쿠의 행위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오타쿠 정의하기의 두번째 글을 통해서 오타쿠와 허구의 관계에 대해 더욱 상세히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이전 글과 마찬가지로, 오타쿠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와 설명을 위해서 따르는 큰 이론틀은 사이토 타마키의 이론이다. (저서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등 참조) 그렇지만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오타쿠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한번은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한 '허구 존재를 사랑하는 오타쿠에 대한 편견'에 대해 간략하게 논해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글의 큰 구성은 1. 허구와 깊게 관계하는 오타쿠와 사회적 편견 2. 지난 글에 이은 오타쿠 정의하기이다. 첫번째 부분은 두번째 부분보다 더욱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을 담은 단상에 가까운 부분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물론 예전에 비해 '허구'의 위상이 많이 높아진 것 같다. 전통적인 스크린 엔터테인먼트(TV 드라마 등 각종 시리즈물, 영화 등 - 애니메이션도 물론 여기 속한다)에 더해서 게임 산업 등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고, 아직 갈 길은 멀어보이지만 VR 테크놀로지의 발전 등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 흐림이 과거보다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실 '가상'과 '허구'는 따져보면 서로 다른 개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글의 맥락에서는 가상이나 허구나 그냥 '현실 세계'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가볍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허구의 위상이 높아진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문화 산업이 발달하면서 이것이 창출하는 경제적 효과가 커지고 가시화 한 이유가 크다. 이 자체가 '허구'라는 개념 자체나 이에 속한 존재의 위상의 상승 지표는 아니다. 어떤 특별한 경제적 유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허구적인 것에 그 자체로 지나치게 몰두하는 행위는 여전히 사회적인 편견의 대상이다.
특히 이 편견에는 '허구적인 것'의 장르가 무엇이냐 하는 부분이 강력하게 연관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예술(art)'이라는 개념 전반에 허구성이 관여한다. 그러나 주류 사회에서 '예술'이 지니는 뉘앙스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예술'하면 떠오르는 장르를 한번 두서 없이 나열해 보자 - 클래식 음악, 오페라, 뮤지컬, 인상파 미술, 현대 무용, 국악 등이 떠오른다. 조금 더 범주를 넓혀서 '대중 예술'이라고 쳐지는 것들까지 포함해 보면 케이팝, 팝 뮤직, 힙합, 스트리트 댄스, 패션, 일러스트 등이 떠오른다. 더 넓혀서 '서브 컬처' 등으로 칭해지는 것까지 떠올려 보면? 만화, 애니메이션, 보컬로이드 음악 등이 있다.
이렇게 범주를 확장해 가면서 나열하는 것 자체가 함의하는 바는, 넓게는 같은 '예술' 군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특정 장르가 다른 장르에 비해 어떤 '예술적인 속성'을 더 강하고 뚜렷하게 지닌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술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예술'인가, 즉 '예술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상당한 철학적 고찰을 요하는 논쟁적 주제이고, 이것이 이 글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적인 인식은 '예술'이라는 것이 무언가 멋지고, 좋고, 긍정적인 것이라는 쪽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런 의미에서 어떤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예술성을 뚜렷하게 지니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 역시 함축한다. 쉽게 말하면, 예술성을 더 강하게 띠는 장르가 다른 장르에 비해 더 우월하고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허구적인 존재와 서사에 대해 다루는 것은 같지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공연과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뭔가 다른 대중적 인식의 대상이 된다. 전자에 몰두하고 소비하는 것은 고급스러운 취미로 인정되지만, 후자에 열광하고 돈을 쓰는 것은 어딘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도 많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만화 영화나 애니메이션, 공상 과학 소설은 어린 아이들이나 좋아해야 하는 것이고, 다 커서 진지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이 가질 만한 취미는 아니다"라는 인상이 이런 예술적 위계가 낮은 장르에는 존재하고, 이것이 오타쿠에 대한 배척과 편견의 모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봤을 때, 결국 오타쿠에 대한 편견과 배척의 이유는,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주류 규칙에서 어긋남, 혹은 이에 대립함'에 기인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어린 시절에만 만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대다수의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장르를 '졸업'한다. 성장한 이들은 주류 사회에서 어른이 가지기에 적합한 취미로 간주되는 허구 장르(소설이나 영화, 뮤지컬 등)를 취미로 삼거나 아예 허구가 아닌 영역에서 취미를 찾기도 한다. 예시를 들자면 패션이라든지, 스포츠, 여행, 혹은 미식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취미가, '허구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몇 달 월급을 열심히 모아서 산 새로운 브랜드 가방이나 친구들과 처음 해 보는 골프 연습, 해외 여행이나 오마카세 식사가, 허구적인 요소는 전혀 가지지 않은 순도 높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오타쿠는, 누구보다 허구성을 의식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세부적으로, 예민하게 인지한다. 세대나 성별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오타쿠의 습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 중에 '과잉 정보력'이 있다. 특정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작품을 좋아하면, 작가는 물론이고 제작사나 작화, 음악, 성우진, 특수 효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 관한 정보를 모은다거나 하는 게 이런 습성의 일환이다. 지면이나 화면 상 존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닌 다른 존재(인간)이 노동하여 마치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움직임과 존재감을 불어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주류 취미의 경우에는 어떨까? 앞서 언급했던 여행 등을 예시로 들어보자. 대한민국의 해외 여행 수요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가령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가서 트레비 분수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을 생각해보자. 이 경험에 결부된 무엇이 허구적이고 무엇이 실제적인 것일까? 로마 땅을 디디고 경쾌한 물소리를 내는 분수 앞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는 일련의 일은 물리성을 띠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틀림없이 현실적인 경험의 영역이다. 그러나 여행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단지 이 자체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로마라는 특정 국가의 특정 도시, 트레비 분수 앞이라는 특정한 장소와 아이스크림이라는 선택된 음식. 모든 요소에는 결부된 이미지가 있고, 욕망은 이 이미지에 기반해 생성된다. 실제적인 경험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허구적인 이미지를 소비하고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즐기는 대중 문화의 여러 요소가 허구성을 띠는 것도 맞고, 오타쿠는 오히려 다른 대중 문화 소비자들에 의해 자기가 즐기는 콘텐츠의 허구성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오타쿠라는 존재가 특이하고,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를 들자면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오타쿠가 허구적 대상에 각별한 매력, 특히 '성적 매력'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가 없는 허구적 대상에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표현하면, 무언가 상당히 변태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게 바로 오타쿠라는 존재에 대한 '석연치 않은' 감정의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타쿠가 허구의 대상에 '성적 매력'을 느끼고 이에 대해 표현하는 상황을 재현해 보자. (해당 상황은 연구자가 실제로 목격한 바를 토대로 살짝 각색한 것이다) 요새는 지하철 역 등을 지나다가다 큰 대형 광고판에 아이돌 사진이 띄워져 있는 광경을 보는 일이 있다. 주로 해당 아이돌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맞아서 팬들이 기념으로 광고판에 메시지를 의뢰하는 것으로, 국내 팬덤 문화의 일환이다. 종종, 이러한 광고판에 아이돌이 아닌 애니메이션 등의 주인공이 띄워져 있는 경우가 있다. 어느샌가 국내 서브컬처 문화의 중심지가 된 홍대입구 역 등에서 이런 광고판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정확한 시작과 기원은 모르지만, 아이돌 팬덤 문화에 2D 오타쿠 문화가 영향을 받아 생긴 현상으로 파악된다.
지하철 역 벽면을 가득 메우는 큰 광고판에 떠 있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등장인물인 리바이 아커만의 생일 광고. 온라인에서 리바이의 광고가 역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리바이 팬 순돌씨는 이것을 직접 보고,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 아침부터 집을 나선다. 가방 안에는 광고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을 때 활용할 리바이 굿즈도 몇 개 챙겼다. 역 근처에서, 자신과 같이 <진격의 거인>을 좋아하는 친구 복구씨를 만난다. 복구씨의 최애는 <진격의 거인>의 또 다른 등장 캐릭터인 앨빈 스미스지만, 좋아하는 장르의 캐릭터 광고가 전광판에 크게 걸렸다는 소식에 감격해서 친구인 순돌씨와 이것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순돌씨와 복구씨는 설레는 마음으로 광고판으로 다가간다. 순돌씨의 시야 속 저 멀리, 리바이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하고, 심박수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전광판 앞 리바이의 모습을 마주하니 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 밀려온다. "정말 너무 잘 생긴 것 같아요." 감격하고 있는 순돌씨 옆에서 복구씨가 말을 걸어온다. 순돌씨가 활짝 웃는다. "그쵸? 이 나른하고 심드렁한 표정이 너무 섹시해요!" 둘은 잠시 소감을 나누다가 뒤로 물러서서 굿즈를 찾아 가방을 뒤적인다. 그때, 전광판 근처를 지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외친다. "이야, <진격의 거인> 리바이인가? 누가 그린거야? 겁나 잘그렸네!" 순돌씨와 복구씨는 순간 멈칫, 하고 서로를 마주본다.
이 상황에서 순돌씨와 복구씨가 느낀 감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왜 순돌씨와 복구씨, 그리고 지나가며 '잘 그렸다!'를 외친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같은 그림을 보고 이러한 표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순돌/복구씨가 느끼는 감정, 나아가 이들이 화면 위의 리바이라는 캐릭터에게 부여하는 어떤 지위가, 지나가던 사람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잘생겼다'와 '섹시하다' 등의 표현은 대상에게 성적 매력을 느꼈을 때 동원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주로 인간, 그리고 나와 동등한 존재적 차원에 있는 대상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존재적 차원'이란 현실과 허구의 두 차원을 칭한다. 즉, 위의 표현들은 보통 현실 세계에 있는 인간이 다른 현실 세계의 인간에게 쓰는 표현이다. 그렇지 않은 대상, 즉 허구의 차원에 있는 대상에게 겨누어질 때 그것은 공허하거나, 나아가서 이상한 것으로까지 여겨질 때가 있다. 이러한 보편적 사고에는 같은 차원의 같은 종의 대상에게만 성적 매력을 느낀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어떤 기제가 사고 체계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적 매력'이라는 표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매력'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이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힘'은, 그 정도가 수치적이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 부여되어야 이해되는, 일종의 측량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강력한 힘이 있다면, 약한 힘도 있다. 따라서 '성적 매력'은 그 대상이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의 정도에 따라 굉장히 강력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약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순돌씨와 복구씨가 리바이의 멋진 일러스트를 앞에 두고 '잘생겼다', '섹시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 이들이 대상에 대한 일정 정도의 성적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TV 스크린에 비치는 연예인 차은우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류의 느낌이다. 즉, 대부분의 인간이 균형 잡히고 건강한 외관을 지닌 인간 상대를 보고 느끼는 쾌적함과 흡족함에 상응하는 정도의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대상과 합일하여 나의 육체적인 성적 쾌락을 추구하고 만족감에 이르고 싶다'는 충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오타쿠가 허구의 대상에 느끼는 '성적 매력'은 그 충동의 정도가 지나치고 강렬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이것은 오타쿠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는, 미디어를 통한 일종의 '부적절한 인상화' 실천이 누적된 데서 기인한다. 비교적 최근인 2023년도에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마스크걸>이라는 시리즈물을 공개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외모 지상주의에 인터넷 문화 발달로 인한 익명성의 폭력 등 민감한 사회 문제를 엮어낸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게다가 몰입감을 불러 일으키는 연출 기법을 동원하며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연출 덕분에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반응이 꽤 뜨거웠다.
연구자가 이 시리즈를 보면서 주목한 캐릭터는 '주오남'이라는 이름의 캐릭터이다. 주인공인 '모미'의 가상 인격인 '마스크걸'에 강하게 집착하게 되어 결국 스토커로 전락하고 스토리를 비극적인 전개로 끌고 가는 데 일조하는 캐릭터이다. 주오남의 모습이 홀로 화면에 잡힐 때 그는 주로 어두운 자취방 안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무언가를 관음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배경에 잡히는 방 속 소품은 애니메이션 피규어 등 전통적으로 '오타쿠'를 상징하는 굿즈들이다. 주오남은 애니메이션이나 화면 속 BJ 등 실체가 잡히지 않는 존재에 몰두하는 것 뿐 아니라, 현실에서는 의사소통 능력이 거의 없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주오남의 모습은 전통적으로 형성되어온 오타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며, 물론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는 오타쿠의 모습과는 다르거나,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재현된 모습이다.
오타쿠가 '허구의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강하고 컨트롤하기 어려운 성적 충동', 나아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오타쿠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 사회에서 부적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행동' 등에 대한 미디어의 묘사야말로 오타쿠를 둘러싼 부정적인 편견의 근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에는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들어지는 것 중 하나가 이웃나라 일본에서 1988~1989년 발생한 '미야자키 츠토무 여아 유괴 및 살인사건'이다. 20대 청년 미야자키가 거주 지역 인근 여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매스컴에 보도되는 와중에 그의 자택 내부 모습 등이 공개되면서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 각종 애니메이션 관련 굿즈가 함께 노출되었고, 이 사건은 오타쿠의 마니악한 수집벽과 은둔지향적인 성격이 비사회성과 잘못된 성도착증과 함께 연결되어 인상화되는 현상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후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과장되고 재현되며 오타쿠의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허구의 세계를 사랑하는 오타쿠는 허구가 허구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이 허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과 같은 차원에 속하는 것을 안타까워 할 때도 있고, 종종 사랑하는 대상이 허구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 그 자체까지 사랑하기도 한다. 허구의 영역에 있는 존재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의 영원불변함이다. 현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의 영향권 아래 변화한다. 허구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앞서 '성적 매력'이란 주로 같은 차원에 속하는 인간인 대상에게 느끼는 것, 혹은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사실을 결정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성 간에 느끼는 것이고, 이런 느낌의 근간에는 생물학적 조건이 있지 않을까요? 즉, 남녀가 합일해서 자손을 생산한다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볼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적어진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과학적 근거에 따른 생물학적 견해'는 확실히 세상을 설명하는 한 가지 관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수많은 경험과 이를 통한 귀납적 추리를 통해 정해지는 명제들의 집합일 뿐이다. 새로운 경험적 데이터, 새로운 추리 방식이 등장하면 이러한 명제에는 언제든 변동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어쩌면,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닌 어떤 대상에 성적 매력, 사랑 등의 끌림과 감정을 느끼는 오타쿠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집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