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정의하기 1/2
+ 서브컬처 연구에서 '정의 내리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 서브컬처 연구에서 '정의 내리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 연구에서 '정의 내리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오타쿠'라는 명칭을 아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말이 일본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역시,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오타쿠'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하나를 예시로 들자면 '오타쿠'라는 명칭은 1970년대 일본 소재 한 대학의 SF 장르 동아리에 속해 있던 젊은이들이 방송에 나와 서로를 '오타쿠'라고 부르는 것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이것이 '특정 장르에 해박하고 깊게 몰두한 사람'을 칭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오타쿠'라는 명칭은, 이러한 의미에 큰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오타쿠'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활발하게 활용되고, '오덕', '오덕후' 등으로 명칭의 현지어화까지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온라인 국어사전 등에도 등장하는 친근한 표현이 되었다. 특히 '오덕후'의 줄임말인 '오덕'은, '-오덕'이나 '-덕' 형태의 접미사로 다른 명사에 붙어서 쓰이면서, 그 명사가 지칭하는 특정 분야에 해박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축덕'은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팬을, '연뮤덕'은 연극과 뮤지컬을 각별히 좋아해서 부지런히 보러 다니는 사람을 칭하는 식이다.
더하여 오타쿠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들도 있다. '팬(fan)', '매니아(mania)', '동인(同人)' 등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오타쿠'라는 용어와 유사한 듯 다른 뜻을 내포한다. 각각의 용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깊게 파고 들어가기에는 글의 전개가 다소 산만해질 것 같기에, 일단은 미뤄둔다.
이렇게 다소 일상적인 형태로 많이 활용되게 되었지만, '오타쿠'나 '오덕'이라는 말이 특정 취미를 수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쓰일 때가 있다. 문맥에 따라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이 '오타쿠'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아이돌 등 서브 컬처 콘텐츠 등을 유달리 좋아하고 이에 몰두하여 해박한 사람'을 칭한다. 가령, 친한 친구가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걔 진짜 오타쿠야."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행동, 성격, 혹은 용모 등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지적했듯이 '오타쿠'라는 명칭 자체의 어원은 불명확하고, 그 쓰임새가 다양하며,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따라서 본인이 '오타쿠'라는 명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위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의 '오타쿠'라는 명칭의 (잠정적이자 통상적) 정의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유달리 좋아함'이라는 조건이다.
가령, 직장인 순돌씨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피곤을 달래기 위해 넷플릭스에 접속했다고 생각해 보자. 무엇을 볼지 몰라서 인기 작품 순위를 보다 보니 <진격의 거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상위에 있어 클릭해 본다. 한두 편 보다 보니까 생각보다 재미있다! 이후 시간을 들여서 <진격의 거인>을 전부 다 봤다. 아,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깊고, 완성도도 훌륭하구나. 다른 것도 봐볼까, 생각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귀멸의 칼날> 같은 다른 추천 작품도 몇 개 더 본다. 그렇게 애니메이션 장르에 빠져서 계속해서 많은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순돌씨는 이제 오타쿠일까?
아까 오타쿠는 서브 컬처 콘텐츠를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유달리 좋아함'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엄청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면 유달리 좋아하는 것이 되나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대중성 없는 매니악한 작품을 많이 보면 오타쿠인가요? 답하자면, 둘 다 '오타쿠'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소비의 이런 양적인 측면보다, 질적인 측면에 집중해 보는 것이 '오타쿠'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오타쿠를 특징짓고 정의하기 위한 여러 시도 중에, 나의 개인적인 경험 및 생각과 가장 잘 맞물리는 의견을 제시하는 학자가 있기에, 간략하게 인용하고자 한다. 학자의 이름은 사이토 타마키로, 일본에서 서브컬처 평론과 대중서 집필의 형태로 오타쿠 문화를 연구하는, 정신분석 의학과 교수이다. 사이토는 오타쿠를 정의하기 위해 여러 조건을 제시하고, 정신분석 의학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개념을 개발해 설명하는 등 결코 단순하지 않은 오타쿠 정의를 내렸다. 이 글은 깊은 학술적 목적을 가지고 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중에 관련도가 높은 것을 선별적으로 인용해 오타쿠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사이토에 따르면, 오타쿠는 1) 허구 대상에 대한 친화력이 높고, 2)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허구화'라는 수단을 취하는 사람이다. 이해를 위해 위에 등장했던 직장인 순돌씨를 다시 데려와 보자.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을 한번 다 본 것만으로는 순돌씨가 오타쿠가 되지 않는다. 비록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이 상당한 분량을 가진 작품이고, 그렇기에 이를 완주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주의집중이 필요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렇다.
허구 대상에 친화력이 높은 오타쿠에게,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허구 인물이 가지는 의미는 일반인들에게 이들이 가지는 의미 이상이다. 가령 순돌 씨가 <진격의 거인>의 등장인물 중에서도 특히 '리바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누군가 <진격의 거인>에서 어떤 캐릭터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리바이'라고 대답하고, 리바이가 나오는 장면은 특히 집중해서 보기도 한다. 리바이라는 캐릭터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원작 작가의 인터뷰나 애니메이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찾아보면서 정보를 모으기도 한다. 일상을 살아가다가 힘이 들거나 고민스러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 힘든 상황을 묵묵히 헤쳐나가던 리바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위안이나 용기를 얻기도 한다. 허구 대상에 대한 순돌씨의 친화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순돌씨는 오타쿠가 아니다.
어느덧 순돌씨는 리바이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멋지고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경의 감정일 수도 있고, 여러 일을 겪으며 함께 지낸 시간만큼 깊어진 우정일 수도 있으며, 용모나 행동이 섹시하다는 생각에서 비롯하는 설레는 감정일 수도 있다(사이토는 허구의 대상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한 개인이 진정한 오타쿠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여기에 대해서는 후속글에서 다룰 예정). 또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시간이나 계기가 다만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가령, 순돌씨가 직장에서 처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때 리바이에 대한 생각이나 그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러한 현실에서의 순간 역시 순돌씨와 리바이와의 시간인 것이다. 정이 쌓여 리바이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순돌씨는, 타인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이, 리바이를 소유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리바이가 현실의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바이가 현실의 인물이라면, 그와 친밀함을 쌓아서 친구 관계가 되거나 고백을 해서 연인이 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함께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의 인간 관계 맺음이 '소유'라는 단어의 함의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그와의 특정한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리바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다. 다소 슬픈 이야기이지만 순돌씨가 설령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리바이에게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열창한다 해도, 그 소리가 일으키는 파동이 리바이의 고막에 가서 닿고 이것이 촉발한 일련의 신경 작용이 뇌에 도달해 사고 작용으로 이어져 순돌씨의 존재를 인지하여 - 마침내 리바이가 순돌씨의 감정에 부응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허구의 대상을 소유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타쿠가 선택하는 전략은 '한 층 더 나아간 허구화'이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할 수 있겠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상상의 존재인 리바이에 대해 더욱더 상상해서, 나만의 상상에 기초한 새로운 상상의 리바이를 만들어낸다. 이 리바이를 탄생시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이 새로운 리바이는 나만의 리바이다. 즉, 소유가 달성된 것이다. 부지런하고 글이나 그림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상상으로 탄생한 리바이에 관해 쓰거나 그릴 수 있다. 이것을 원작(1차 창작물)에 대한 2차 창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물리적으로 생산물을 창출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머릿속에서라도,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특정 허구 대상(인물)에 대해 원작에는 없는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면, 그것이 '한 층 더 나아간 허구화'에 해당하며, 소유 활동의 일환이다. 어, 그럼 순돌씨는 이미 직장 위기를 리바이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이겨낼 때부터 이 소유 활동을 시작한 것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 있다. 오타쿠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몇 개의 과정은, 애초에 그렇게 서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단계가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순서를 바꾸어서 일어날 수 있다.
사실 순돌씨와 리바이의 관계 발전 양상은, 오타쿠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극도로 일반화되고 축약적인 서술형 예시이다. 한 개인이 오타쿠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의 서사 구조로 수많은 사람이 거친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은 때때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종종 한 단계와 다음 단계 사이에 긴 시간적 간격이 생기기도 한다. 또한, 일상의 위기 등 극적인 일을 계기로 하지 않고,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기도 한다. <진격의 거인>을 보던 순돌씨가 다음 순간 갑자기 '리바이를 가져야겠어'라고 명확히 생각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자락 젖어 들듯이,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자주 그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덧 나의 상상 속에서의 그이가 구체화한다. 그에 대한 나만의 판타지가 생겨난다 - 어라? 어떻게 보면, 현실 대상과의 사랑을 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 사족이자, 글쓴이의 학문적 고찰 (오타쿠에 직접적으로 관련하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해당 부분에 관심이 있어서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읽지 않아도 무방함)
이쯤에서 일단 마무리하면서, 오타쿠에 직접적으로 관련하지는 않지만 이 글을 통해 꼭 남기고 싶은 의견을 남기도록 하겠다. 사실 무언가를 '정의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정의를 내려야 하는 대상이 어떤 고정된 물체나 정확히 똑같이 반복되는 현상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일 때 그렇다. 그 대상이 인격을 가진 인간이라면, 게다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을 포괄한다면 이 정의하기 작업의 난이도는 극에 달한다.
무언가를 정의 내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경험적 학문 영역인 과학 분야에서라면, 정의를 내릴 대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복수의 관찰 사례를 관통하는 일관된 요소를 추출해내서 그것으로 대상을 정의한다. (가령 물은 투명한 액체로,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 이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충족하지 않으면 그것은 물이 아니다.) 과학적 현상이 아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탐구의 영역에서 역시 방식은 비슷하다. 정의 내려서 개념화하고자 하는 하나의 범주에 속하는 여러 개별 사례를 수집하는 것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이 개별 사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요소를 추출하고, 이것을 일관성을 가지는 '정의' 혹은 보편성을 띠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편적 요소 이외의 수많은 부분은 제거된다.
이 글을 통해서 잠정적이나마 오타쿠를 정의했다. 아직 오타쿠 정의를 위해서는 더 많은 탐구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확립한 정의에 따르면, 오타쿠는 '허구적 존재에 친화력을 가지고 그것을 한층 더 깊은 허구화 작용을 통해 자신만의 허구 존재를 소유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성향 내지는 활동 양상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오타쿠가 아니게 된다. 분명히 누군가는 이 정의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나는 이러한 성향을 지니고 활동을 하는 오타쿠는 맞지만, 당신이 설명한 그 과정에 부합하는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정의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아는 척하면서 일반화하려는' 그 태도 자체에 반감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하고, 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무한하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특정 사람들(오타쿠)에 대해 아는척 하고, 일반화 한 것이 정확히 글쓴이가 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언가를 보편화하고 정의라는 틀 속에 집어넣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학문의 본질이다. 학문은 특정 대상을 향한 탐구이며, 혼자 갈고 닦을 수도 있지만 비슷한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복수의 사람과 함께 할 때 시너지를 낸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함께 특정 대상이나 사실에 관해서 토론하고자 할 때는, 우리가 지금 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전제, 혹은 적어도 지금 말하고 있는 내가 상정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상대 역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어떤 대상이나 사실에 대한 정의인 것이다.
글쓴이가 오타쿠를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것도, 더 많은 사람과 오타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더 많은 논의와 대화를 위한 시작점 마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아이러닉한 것 같기도 하지만, 더 많고 다양한 개별 사례에 관해서 이야기 위한 보편화 작업을 선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