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자본주의 사회의 디오니소스

by 요비

아래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쓴 글로, 내가 쓴 최초의 영화평(?) 격의 글이다. 이 글로 브런치를 쓸 수 있게 되었다(이후 별로 글을 쓰지 않았지만...) 한정된 삶의 경험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여러 각도와 깊이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철학과 미학 공부를 계획하고 꿈 꾸던 때의 글이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기초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닥치는대로 플라톤의 시학부터 글을 읽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학자들의 이름과 생소한 개념어들과 싸우면서 말이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급급하고 그 방대한 양을 소화하는데 허덕였을뿐, 새로 생긴 지식을 생산적으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조커>를 보고 나와서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날, 갑자기 '뭔가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노트북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방 안을 뒤져서 간신히 찾은 펜과 종이에 이 글을 전부 썼었다. 정말 즐거웠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집중해서 글을 썼고, 극장에 붙어있던 카페를 나서자 길은 이미 어둑어둑하고 바람이 차가웠다. 늘 음악을 들으면서 길을 걷는데, 이 날은 이어폰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음악을 듣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지금 보면 부족하고, (사실 내 어떤 글이든 그렇지만) 미숙해서 부끄러운 글이지만, 오랜만에 꺼내어 읽어보니 글 자체의 내용보다는 이걸 쓸 때의 기분과 마음가짐이 생각나서 다시 이걸 내놓아 보고 싶어졌다. 그때에 비하면 아는 것도 많아졌는데(그래야만 하는데...? 아니면 어떡하지ㅎㅎ)... 나는 이 때만큼 즐거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조커의 전신 아서는 사회의 상처입고 썩은 부분에서 흘러내리는 피고름을 온전히 받아 마시며 자란 존재이다.


“넌 항상 웃는 아이었어, 해피.

넌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어 줄거야.”


하지만 누가 ‘우스움’을 규정하는가? 언젠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게 될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온 해피의 조크에는 누구 한 사람 웃음지어 주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놓은 ‘우스움’의 규칙이라도 있는 것만 같다.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에 맞춰 남을 웃기려고 하는 내 모습은 무엇이 되는걸까?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가면 밑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받아 마시고 자라온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조커는 탄생한다.


극의 배경인 고담시티는 설정자체가 어둡고 온갖 범죄의 온상으로 그려진다. 관객들은 도시의 이런 설정이 다만 히어로의 탄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극중의 고담 시티가 실제 진실된 사회상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생은 본질적으로 불행하며, 인간의 고통은 숙명이다. 견디기 힘든 이러한 고통의 늪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두가지 전략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아폴론적 숭배이다. 삶이라는 것이 순전히 우연성의 지배하에 놓여있으며 결함이 많은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이겨낼 방도로서 어떠한 완전성을 꿈꾸게 된다. 극 중에서는 크게 정치인 웨인, 그리고 쇼 호스트 머레이 프랭클린이 이러한 아폴론적 우상을 대변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을 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척도’와 ‘규준’을 엄수하며 불완전한 세계를 다스리는 일에 힘쓴다. 이들을 숭배하며 아폴론적 세상에 몸 담은 사람들은 사회의 어두운 일면(즉 본질)을 외면하며, 이러한 리더들이 제공하는 아름다운 가상에 도취된 채 살아간다.


머레이는 잘 꾸며진 스튜디오 안에 몸을 숨긴 채, 사회의 모든 추악한 부분을 무시한다. 그것들이 마치 철저하게 타인의 일인 것처럼 우스갯거리로 삼는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동질감을 형성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하면 공포를 느낀다. 소수가 아닌 다수의 입장에 섰을 때, 인간은 으레 가학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자신을 안전하게 하고자 한다. 머레이 쇼의 관객들은, 코미디쇼 동영상 안의 아서를 웃음으로 죽였다. 웃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기를 쓰고 웃는 아서의 모습은 규칙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자신을 철저히 조롱거리로 삼고 비웃음을 날리는 머레이와 관객들에 의해, 아서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병원에서 브라운관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은 영혼 없는 텅 빈 육체의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또 다른 유형의 아폴론 숭배를 그린다. 웨인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철저히 부정하고 혐오한다. 아서의 존재는 웨인에게 일말의 웃음조차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경멸스러운 것이며, 아서의 정성어린 퍼포먼스는 웨인 아들의 입꼬리를 단 일미리미터도 올라가게 하지 못했다. 자신이 철저하게 부정되는 그 세상은, 불행하게도 아서가 자신의 근본이라고 믿는 곳이다. 아서는 절망감에 발악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서의 몸부림조차 그들에게는 게으르게 살아온 사회적 루저의 경멸스러운 광대짓에 불과할 뿐이다. 몸부림에 등돌린 채 그들은 말쑥한 차림으로 카메라 렌즈 앞에 선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눈동자에게 당신들을 사회의 어둠으로부터 구원하겠노라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는 과연 구원해야 할 존재들의 그것일까,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들의 것일까? 올라서기 위해서는 짓밟아야 한다. 경멸의 대상을 경멸의 이유로부터 구원해내겠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의 말을, 혹자는 믿고 자신을 속인다. 아폴론적 가상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선두에 아서의 엄마, 페니가 있다. 페니를 죽인 것은 아서일까 조커일까?


(극중에서 우리는 웨인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이 극장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감상하며 웃는 장면을 접한다. 찰리 채플린은 서구 자본주의와 물신주의가 급부상하던 때 이를 비판했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마저 상업화하여 웃음거리로 삼는 이들을 보며, 조커를 탄생하게 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폴론적 숭배의 대상은 단 하나, 혹은 소수만이 될 수 있다. 이 시스템 안에서, 숭배받는 자 이외의 모두는 두가지 선택지를 가진다. 적극적으로 숭배하는 행위에 동참하거나 혹은 소외 당하는 것. 많은 경우 후자를 스스로 택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소외자가 되기로 택한 사람은, 그리고 다시 한번 다른 의미의 우상을 탄생시킨다. 조커는 그들이 정해준 웃음을 웃지 않기로 한다. 그들이 정해준 규정에 따라 사람들을 웃기려 하는 짓도 그만둔다.

인간이 고통을 면하는 두번째 방법은 디오니소스적 도취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가상을 창조해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아폴론적 숭배와 달리, 디오니소스적 존재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넘어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통 그 자체에 몸을 맡기고 도취되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극복법이다. 제한이나 형태를 만들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규범에 따른 형태를 지닌 것들은 다시 말해 규범에 따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배척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장벽과 제약들을 부수며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 오직 디오니소스적 극복에 몸을 맡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조커가 머레이쇼에 등장하는 부분은 그렇기에 디오니소스의 아폴론적 세계의 침범이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두 세계의 조우이다. 아폴론적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조커의 등장에 잠시 흥미를 느끼지만, 곧 이질감을 느끼고 이를 불편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들 모두가 아폴론적 조형에 참여하는 숭배자들이다. 그 조형을 파괴할 에너지를 잔뜩 품고 등장한 디오니소스는 불안 그 자체로 감지된다. 그들은 정해진 ‘옳음’, ‘적절함’, 심지어 ‘우스움’에 익숙하다. 사회자와 게스트들은 이러한 규칙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안정감 있는 유흥을 선사한다. 스튜디오 안의 모든 것은 가짜이다. 지극히 진실된 조커의 자백 마저도 우스꽝스러운 효과음으로 포장되는 그 곳에, 진실이 있을 자리는 없다. 진실은 삶의 본질이며, 그것은 니체에 따르자면 고통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며, 조커는 그 욕망의 화신이다. 관객들은 불편함을 넘어 공포감을 느낀다.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단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며 조커를 스튜디오 밖으로 내치라고 소리 높인다.


조커는 새로 태어난 존재이지만, 그의 전신인 아서는 아폴론적 세계에서 태어나, 아폴론적 희망을 가지고 자라난 존재이다. 이른바 ‘희망’의 맛을 알고 있는 조커 역시 스튜디오의 긴장감이 불편하다. 에너지의 불균형은 조커를 필연적인 파괴의 길로 인도한다. 머레이의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고, 텅 빈 스튜디오에서 조커는 춤을 춘다. 그의 춤은, 해방의 의식이며 동시에 불안감을 잠재우는 주문이다. 조커 안에 상충되는 두 욕망 – 아폴론적 세계의 안락함을 갈구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학습해온 욕망, 그리고 파괴의 희열에 몸을 맡기고 싶은, 해방되고 싶은 디오니소스적 욕망 – 이 빚어내는 춤사위는, 그래서 슬프다. 영화에는 이런 조커의 춤이 몇 번 나온다. 극을 통틀어 조커가 하는 가장 밝고 경쾌한 행동일지 몰라도, 광대에게 가장 어울리는 행동일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웃을 수도 기뻐할 수도 없다. 나를 온전히 놓기도, 붙잡고 있기에도 고통스러워 나오는 춤. 그는 우상이 되었지만 두려움을 느낀다. 피 묻은 손가락으로 붉은 입을 더 길게 찢고, 가면 뒤로 숨는다. 그 뒤에서, 자신이 시작한 파괴를 목도한다.


아버지 없이 자란 조커에게 가장 그에 근접했던 존재는 아마 머레이였을 것이다. 상상에서나 현실에서나, 머레이는 자신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해 보이지만 실상 자신을 완벽하게 부정한 웨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조커는 깨닫는다. 그의 이마에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극의 오이디푸스적 서사가 완성된다. 아버지를 죽인 자식에게는 이제 아무런 선택지가 없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만 한다. 자신만의 서사를 시작한 조커가 폭력 시위대의 추앙을 받으며 순간에 몸을 맡길 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기회마저 박탈당한 아폴론의 씨앗이 뒷골목 어딘가에서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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