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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별 Jan 27. 2021

[실실실] 4. 불효녀는 웁니다

엄마 나 잘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자란다.

코로나 19가 활개를 치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도

아이들은 층간소음도 모른 채 그렇게 자란다.”


요즘 나의 일상을 가만히 시처럼 중얼거려본다.


 이른 아침 남편이 혼자 일어나 출근하고 나면 넷이 함께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간식 같은 아침을 대충 먹거나 너무 늦으면 안 먹인 채 셋째가 자는 동안(또는 안 자면 아기띠를 하고) 얼른 옷을 입히고 가방을 챙겨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후다닥 집에 와서 셋째를 보거나 늦은 아점을 먹고 수유를 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늦은 오후까지 집안 환기하고 세탁기, 건조기를 돌리거나 세탁물을 개고 넷플릭스를 켜 두고 셋째를 보며 저녁 메뉴 고민과 요리, 그러다 보면 하원, 저녁식사, 목욕, 설거지와 뒷정리.

“위험해. 뛰지 마라! 살금살금!! 이제 좀 자라 자라!”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하루.

사진엔 잘 안 보이지만 함박눈 오던 날, 일찍 퇴근한 아빠와 하원하고 눈 보던 아이들

  어린이집이 평일에 키워주지만 신생아와 아직 어린 유아 둘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점점 말 안 듣고 하지 말라는 것만 더더 해대는 애 둘을 보니 화내고, 짜증내고, 그러다 애들을 울리고...

 나와 남편은 정말 끝을 향해 가는 것 같았다. 결혼 초의 다정한 남편은 어디 가고 무서운 아저씨가 홧김에 아이들을 자주 다그쳤고, 그에 못지않게 포악한 아줌마는 자상한 척하다가 자주 돌변했다. 애들이 걱정이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밤이 되면 내 어린아이들이 아까워서 나는 반성했고 여러 번 울었다. 안 되겠다 싶어 셋째 출산선물로 받은 교보문고 상품권을 보태 감정과 육아와 관련된 책들을 샀다. 언제나 그렇듯 책만 사면 늘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선뜻 자애로워졌다. ‘책아 빨리 와. 내가 얼른 읽고 좋은 엄마, 좋은 부모가 될게.’


제일 먼저 읽은 건 육아의 신, 오은영 박사의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라는 신간이었다. 처음부터 읽지 않고 내 맘대로 중간부터 보는 성격상 딱 펼쳐진 부분을 읽다가 나는 그만 임자를 만나버렸다.


 자폐증이 있는 남자아이 키우던 엄마가 병원을 가다가 크게 사고가 났는데 아이는 괜찮았지만 엄마는 심각하게 다쳐 중환자실에 누워 지냈다. 이후 이모와 함께 지내던 아이가 매일 엄마를 찾아와 귓속말을 하고 바로 나오기를 몇 달, 엄마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고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이모가 아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엄마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한 말.


“엄마, 나 잘하고 있어요.”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애들을 재우려고 다 같이 안방에 들어와 있었는데 눈치도 없이 금방 눈물이 차오른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해줄 때, 자기 마음을 알아줄 때 가장 행복하고 부모의 웃는 얼굴에 행복감을 느낀단다.

 내가 그랬다. 딱 내가. 기억은 10살쯤의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95점을 맞았다고 자랑하는 순간으로 돌아간다.

 38살쯤의 엄마였다. 엄마는 웃지 않았고 표정이 크게 없었다. 그즈음의 나는 엄마가 TV 광고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울릉도에서 슈퍼를 하고 애 셋을 키우며 지쳐있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늘 부지런했지만 피곤했고 일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잘하고 있어요.’

수없이 그런 마음으로 나는 엄마에게 매일 다른 말을 걸었다. 언니에 비해 공부에 딱히 취미가 없던 내가 운 좋게 90점, 95점을 맞아도 엄마는 잘 웃지 않았다. 빠르게 눈길을 돌리며 하던 일에 집중했다. 물건을 정리하고 카운터에 서서 손님들을 맞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저 “잘했네. 다음에 더 잘해라.”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참 갈증이 났던 것 같다.


 우리 엄마. 육 남매 중 장녀로, 가고 싶던 약대는 당연히 접어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서 일하며 중매로 아빠를 만나고 결혼 일주일 전까지 도 일하다가 평생 살아보지도 못한 섬에 와서 또 안 해본 슈퍼 일을 하고 애 셋을 낳아 키웠다. 그리고 지금도 바쁘게 일을, 심지어 투잡을 하신다.


 얼마 전 평일에 엄마가 태워준 작은 차 안에서 엄마는 그래도 자기를 고등학교까지 보내 준 외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그랬다. 큰아버지가 와서 여자애를 고등학교까지 보내면 다음 애들도 고등학교, 대학교 다 보내야 한다고 말렸다는데 형제들 중 막내였다던 외할아버지는 큰 형님의 잔소리를 그저 묵묵히 듣고는 다음 날 아침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고등학교 등록금 주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잊지도 않고 기억한다던 금액이 5800원이었다던가... 결국 막내 이모는 엄마 덕인지 삼촌 둘을 제외하고 여자 형제 중에 유일하게 대학을 갔다.


셋째가 운다. 다시 현실이다. 내가 슬퍼도 아이들은 모른다. 알 턱이 있나. 그저 엄마는 늘 엄마여야 한다. 얕은 눈물을 대충 닦고 책을 덮었다. 불을 끈다.  어쩔 수 없이 나쁘지만 젖을 물려 재우려 수유하며 등 뒤에 매달린 둘째의 손을 잡는데 작고 마른 손이 그리 크지도 않은 내 손에 쏙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딸 손이 이렇게 작고 차...”


하는데 이번엔 아빠가 생각났다.

아쉽지만 이건 우리 셋째 손이다. ㅎㅎ


아빠는 늘 내 손을 잡고 힘 있게 쥐었다 펴며

“아이고, 손 하고 발이 이렇게 작냐.” 그랬다. 내 나이 서른 중반쯤까지 그랬었다. 난 정말 그저 작아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무려 30년간. 그런데 그 말을 한 심정을 이제야 알았다. 눈물이 다시 터진다.


나는 작고 야리야리한 내 딸이 안쓰러웠는데 30년 넘게 아빠는 그런 마음이었던 거다. 언니랑 남동생은 키도 손발도 크고 튼튼한 편인데 그에 비하면 나는 작고 자주 골골댔다. 1년에 크고 작게 몇 번쯤 아팠다. 믿기지 않겠지만 20대까지 감기, 장염, 식중독 같이 남들은 멀쩡한데 똑같이 생활해도 나만 아픈, 그런 약체만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왔다.


 얼마 전 부모님이랑 평소와 똑같은 통화를 하고 마치는데 아빠가 언뜻 다른 어조로 “몸조리 잘해라. 아프지 마라.” 하는데 뭔가 무게가 달랐었다. 복선이었나? 젖을 빨던 셋째는 잠들었고 등 뒤에 매달렸던 둘째도 떨어져서 잠들었다. 눈물을 참으면서 흘리다가 숨이 넘어가고 조금씩 몸이 들썩이게 울었다. 그래도 애들이 잠들어서 다행이다.(생각했는데 첫째가 애착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본다)


참 불효자다. 너무 늦게 이런 것들을 안다. 남들은 하나만 낳아도 잘 알던데 나는 자식 셋을 낳아보니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남이 쓴 책 한 구절 읽다가 어느 날 이렇게 펑펑 울면서. 그렇다고 내일 당장 “미안해요. 사랑해요.” 하지 않고 항상 툴툴거리고 빈정대는 딸 노릇을 계속할 테지만 나는 알고야 말았다.


사는 게 바빠서 내게 큰 반응 없던 엄마도, 보이지 않는 걱정에 내 손을 잡아보던 아빠도 사실 나처럼 발 동동 굴리며 아이를 키워왔다는 걸.

 그리고 그 딸이 부모 기대에 못 미치게 자라서 겨우 밥벌이하고 혼자 살다가 뒤늦게 결혼해서 애를 셋이나 낳고 허덕이며 사는 게 얼마나 마음 쓰일지 상상할 수 없다는 걸.

끝으로 내가 우리 딸이 이러면 매일 울 것 같다는 걸.


정말, 불효자는 웁니다.

겨우 눈물을 멈추고 나는 그렇게 잠들었다.

아, 이러면 책은 언제 다 읽나?

아직 3권 더 남았는데 

난 벌써 좋은 엄마보다 불효녀가 먼저 돼버렸다. 

아빠가 두꺼운 자기 손으로 꾹꾹 눌러보며 안쓰러워하던 내 손. 지금은 김씨 넷을 거둬먹이는 큰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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