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가치

by 밤돌

저출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라는 수치는 한국이 세계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주변에서 아기를 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아기와 함께 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애국자가 되어 있다.


애국자가 되려고 한 적은 없다. 양가 부모님은 얼른 아이를 가지길 원하셨지만 우린 다른 세대였다. 어느 세대보다 내 삶을 결정할 권리가 큰 세대였다. 누구나 그러하듯 자식을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었고, 자식 없이도 둘이서 잘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2세를 낳기로 결정하였다. 아이를 낳기 꺼려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가장 큰 고민이 있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도 계시고 나를 선택한 아내도 있지만 내가 나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닮은 또 다른 누군가가 나와 같은 괴로움을 겪는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삶의 어느 지점부터 괴로움이 나를 압도하더니 결혼 한 뒤에는 아내까지 괴롭게 만들었다. 항상 부부 갈등의 불씨는 내 담당이었고 시련과 고난 앞에서 힘겨워하는 것도 내 역할이었다. 만약 내 곁을 지켜주는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껏 같이 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들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대단한 성인군자도 아니며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말에도 쉽게 무너져 내려서 깊은 속마음까지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연약한 사람이다. 나약한 속마음을 지키기 위해 날카로운 뿔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는 것이 나라면, 물의 표면장력보다 약한 막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내였다.


우리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치달을 때마다 나의 날카롭고 단단한 뿔은 아내의 마음을 손쉽게 뚫었다. 그때마다 마주친 아내의 순수한 본성에 너무 미안하고 괴로워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은 넝마주이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멀리서 봐도 아내의 메마른 상처가 뚜렷하게 보일 때가 되어서야 변하였다. 내 마음을 보호하던 뿔의 방향을 고쳐서 아내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내도 변했다. 이제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내의 상처와 눈물을 함께 어루 만지는 과정 속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는 튼튼히 자라서 나를 드높이 올려주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뀌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닮은 자식을 낳고 싶다는 본능은 급속도로 힘을 얻어갔다. 나를 변화시킨 아내를 보며 그녀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까지 똑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내 모습은 하나도 닮지 않은 복제인간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아무래도 좋았다. 나를 바꾼 아내라면 나를 닮은 우리 아이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란 훨씬 쉬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품에 안게 되었다.


난 윗세대와 다른 세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만큼이나 나는 한 여자와 평생 함께 살겠다는 약속을 해야 할 까닭을, 아이를 낳아야 할 까닭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말로 표현 못할 가치가 차고 넘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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