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혼 Oct 24. 2021

랜덤박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자녀를 키우면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은 걱정이 들 때가 수도 없이 많지만 괜찮다는 근거를 하나도 찾지 못하고 걱정을 그만둬야 할 때가 있다. 바로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다. 임신 중에 몇몇 검사를 하거나 입체 초음파와 같은 기술로 아기의 건강, 외모 등을 확인하지만 태어나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가만히 누워서 자고 있는 아내를 보다가도 갑자기 불안해지는 이유다.


 우리 부부는 다른 부부보다 더욱 두려운 편이었다. 유산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경험 없이 내딛는 세계는 불안보다 설렘이 커서 밝고 환한 핑크빛 세상처럼 느껴지지만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뒤에는 크기에 상관없이 불안함이라는 녀석이 손을 잡고 놓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걸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 부부는 불안함에 대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에둘러서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이번에도, 유산하면 그만하자. 그리고 우리 둘이서 여행 실컷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자."


 그러면 아내는 덧붙이는 말 없이 대답했다.


 "그래."


 기분이 가벼울 때는 내 큰 머리를 닮으면 어쩌나, 내 성격을 닮으면 어쩌나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에는 안 좋은 부분만 모두 닮아도 좋으니 12주만 넘어가기를 바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내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더욱 불안했다. 티를 내지 않으면서 아내를 보살피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내는 전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이 참 간사해서 고대하던 날이 오면 맥이 풀리고 좋은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시험이 끝난 날, 전역하던 날 등등 인생에서 기다리던 날들은 그날의 풍경이 기억에 남아있지만 어떤 감정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모든 순간의 끝에는 허무함, 또는 공허함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12주를 지나던 날도 그랬다.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만 병원을 나와서 아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차에 앉아 있던 순간, 기다리던 날은 끝이 났다. 잠깐 동안 그날의 끝이 맴돌았지만 곧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당연하게 여겨졌고 새로운 고민과 걱정이 생겨나며 또 어떤 날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유산과 건강에 대해서는 생각을 덜하게 되었다. 대신에 태어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아들의 모습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면서 출산일이 무척 기다려졌다. 유산의 아픔 탓인지 우리는 드디어 허락된 행복한 기다림을 최대한 즐기려 했다.


 파란색과 분홍색 중에서 어느 것을 좋아할지 정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수정이 된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지만 야바위꾼의 교묘한 손놀림에 놀아나는 사람들처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미신을 갖다 붙이며 추측하곤 했다.


 누가 봐도 추측할 수 있을 모양이 초음파에 발견되면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라고 시작하는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건만 주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아기의 탄생에 흥분한 사람들은 집에 있는 인형이 문제였니, 내 기도 탓이니 하며 같이 즐겨주었다.


 성별만 결정되었을 뿐인데 우리의 즐거운 고민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들일 때 일어날 여러 문제들, 아들이 가졌으면 하는 외모, 성격 등을 이야기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두 사람의 장점을 고르게 물려받았으면 했지만 아들이다 보니 아빠를 비교해서 상상을 많이 하였다. 머릿속에서 여러 조합을 해보거나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해보기도 하며 나보다 나은 아들의 모습을 기대하였다.


 그러다가 입체 초음파 사진이 나오면서 잠잠해지던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세상이 참 좋아서 사진은 친인척에게 순식간에 퍼졌다. 코가 어떻니, 눈이 어떻니 하며 각자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우리 부부의 옛 사진을 가져다 놓고 겹쳐보는 이도 있었고 우리 얼굴을 다시 관찰하는 이도 있었다.


 아들이 세상에 나온 순간은 더 재미있었다. 고화질 영상을 돌려보고 다시 보며 많은 사람들이 누구를 닮았는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퉁퉁 부은 아들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여 모든 사람의 추측을 뒤집었다.


 부부의 유전자는 정확히 반반 섞여서 아들은 반씩 닮았겠지만 조리원에서부터 걷고 있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누구를 닮았느니, 누구 어릴 때랑 비슷하니 하면서 말을 건넨다. 출산이 랜덤박스의 개봉인 줄 알았는데 아들은 여전히 랜덤박스 그 자체다.


매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저 랜덤박스를 만들고 열어보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다.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고 뭔가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이런 성격은 살아가는데 안 좋은 점이 참 많았는데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도 그랬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매우 희박한 상태는 무척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두렵고 힘들었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손꼽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전자로 이루어진 아이를 만나고 그 아이가 나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일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 10개월을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힘을 보태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유전자가 반씩 섞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해준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같이 기다릴 수 있었다. 그들은 누구를 닮았는지 정확히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귀엽고 사랑스러운 랜덤박스를 열어보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건강하고 무사히 태어난다는 전제를 하고 이야기하는 그들 덕분에 우리도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말을 걸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대디 비긴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