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똥구멍만큼의 가능성이라도 그게 어디야?

(9) 대기업 경력직 도전기!

by 돌콩

"또 뭐 먹을 거 없어?"


배에 거지가 들었나~ 는 이런 때 쓰는 말이지. 입에 뭔가를 먹고 있으면서도 그다음 먹을 것을 찾는 아들에게 일차로 과일을 깎아 대령하고, 이차로 아이스 초코를 만들어 대령했다. 초 집중 모드로 카트라이더를 따라 몸을 움직이던 아들은 한 판 게임이 끝날 때마다 손을 뻗어 간식을 입 안으로 우걱우걱 집어넣고, 그 손을 옷에 쓰윽 닦은 다음 다시 핸드폰 게임을 한다.


공부방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라~ 좋은 말로 두세 번 말을 해도 들릴 리가 없고. 기어이 소리를 한 방 지르고 나서야 털레털레 아들은 공부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친다. 애야 공부를 하러 들어가든 말든 볼륨 높여 야구 경기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매서운 눈초리로 레이저 한 방을 날려주고 tv를 기어이 끄고 나면 밤 9시.

그제야 내 시간이 잠깐 찾아온다.


노트북이 펼쳐져 있는 책상에 앉는다. 갑자기 얼굴에 열기가 오르고 심박수가 조금 빨라짐을 느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조용히,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쉰다. 긴장된 모습을 들키기 싫다. 보는 이 하나 없는 혼자인 방 안이지만.


두둥!

'직무 과제 결과에 대해 안내해 드립니다' 제목으로 시작하는 메일이 오후 4시경 도착해 있다.

왠지 느낌이 좋진 않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빨리 결과를 알고 싶다.




나의 첫, 대기업 채용 도전기다.


'나, 자발적 경단녀 아니다~ 나도 일하고 싶다고!'

아이를 간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가 쉬고 있을 뿐이라고. 나의 빛나던 청춘을 잊지 말라고. 남편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켰지만 십 년이라는 시간 앞에 무용지물이 된 것 같았다. 이제 그 누구도 나의 경력단절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 같고, 이제는 애도 다 컸는데 집에서 먹고 노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그런 때, 때마침 나타난 대기업 경력직 공고가 내 마음에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될까? 해 봤자 안되지 않을까?'


부정이 가득 담긴 질문이 쉴 새 없이 뇌를 채워가는 동안 또 한 번의 자소서와 이력서를 쓰게 되었다.


이번에도 이력서의 칸을 채우기는 역시나 난감한 일이었다. 10년간 거쳐 온 방송 프로그램은 A4 한 장을 빼곡히 채우고도 넘칠 만큼이었지만, 정작 지원할 회사의 이력서 포맷에는 경력을 적을 수 있는 곳이 몇 줄 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회사원들의 이력서에 방송작가의 경력을 채워 넣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적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 경력란과 관련 논문란, 그리고 어학 자격증 란에 줄줄이 내 경력을 채워 넣었다. 어차피 논문란과 자격증란에 써넣을 것도 없고.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써 내려간 자. 소. 서는, 딱. 칸 채우기에 성공한 것에 만족하며 마무리했다. 내가 일을 그만둔 지 년수로 열 손가락을 채워간다는 끔찍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는 한숨이 절로 났다.


'안될걸? 좀 창피한데? 받는 사람도 황당하겠다. '

'이 방식 좀 괜찮지 않나? 광고 내레이션 같지 않나? 뭔가 좀 차별성 있는 자. 소. 서이지 않을까?'


좌절과 자뻑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시소를 탔다.

뭐 어때, 안되면 안 되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이력서와, 자소서 _답지도 않은_ 자소서 제출을 마치고 나니, 오랜만에 큰 일을 해 낸 듯 피곤이 몰려왔다.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일 것 같은데, 이게 또 뭐라고 은근 기대가 되는 것이었다. 하긴 얼마 전, 초등학교 기초학력 부진학생 공부 도우미로도 지원했지만 땡! 떨어지지 않았던가. 하물며 대기업 경력직에 서류 통과를 할 리가 없지.



경력직 서류 접수 결과는 일주일 후 발표였다. 그런데, 메일 알리미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때_ 설거지하다가_ 합격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응시 사실은 남편에게도 비밀이었다. 동갑내기인 남편에게는 뭐든 다 자존심이 앞선다. 서류 접수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나면 자존심이 무척 상할 것 같았다. 밤이 늦도록 고민을 하고, 경력을 확인하느라 온갖 대본을 꺼내 경력 기간을 맞추어보고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도, 새벽에 일어난 남편을 잠 못 자고 마주했을 때도.... 요즘 불면증이 와서 잠을 잘 못 자네... 애꿎은 불면증 탓만 해댔다.


그런데 이렇게 서류 합격을 하고 보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흠흠. 그동안 잊었나 본데~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남편한테 큰 소리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곧이어 주어진 업무과제와 포트폴리오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뜨악! 포트폴리오라니. 도대체 해 봤어야 말이지. 하물며 파워포인트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아니, 작가 경력을 어떻게 포트폴리오로 정리하냐고요! 어디 말도 못 하고 하루 종일 끙끙 앓다가 파워포인트를 잘할 것 같은? 남편에게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사실 나. 00그룹 경력직 작가 공고가 나서 응시했는데 1차 서류 합격을 했어
우와~~~~~짝짝짝 대~박


남편은 우리 딸 장하다~ 쯤의 표정으로 나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내 평생소원이 알바처럼 회사를 다니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네가 대기업에 일을 하게 되면 안정적이니까 그만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거란 얘기지~


남편은 사실 그동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버티고 있던 것이었노라며. 내가 일을 시작하면 꾹꾹 참지 않고 사표를 던질 수 있지 않겠냐고. 그간 품고 있던 말을 꺼내어 놓았다. 이제 겨우 1차 서류 통과일 뿐인데. 사표 얘기라니. 헛.


'누가 너 혼자 일 하래? 나 일 못하게 만든 게 누군데?'

'당신이 그렇게 그만두고 싶은 회사일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거라고! '


목구멍으로 분노의 말이 솟구치려 했지만 꾹 참고 아직 서류 통과일 뿐이니 큰 기대 말라고 얘길 했다. 남편은 대기업 서류 통과가 웬 말이냐며 진짜 대단하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업무과제를 받은 다음날부터 아침 9시가 되면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내 피곤한 하루 루틴을 말하자면. 5시 20분에 출근하는 남편에 맞추어 5시 10분 전 기상하여 사과 당근즙을 만들어 주고, 남편이 씻는 동안 ebs 왕초보 영어를 본다. 남편이 출근하고 가볍게 새벽 기도를 하고 나면 6시경 큰 고뇌의 시간이 찾아온다. 더 잘 것인가 깨어 있을 것인가.


이왕 새벽에 일어난 거 미라클 모닝을 해 보자고~ 그 시간에 한국사 강의도 듣고 요가도 하고 ~ 등등의 계획을 세우지만 벌써 세 달이 넘게 루틴을 못 잡고 고민하는 게 루틴이 되었다.


그렇게 잠깐 번뇌의 시간을 거쳐 1시간 30분쯤 꿀잠을 자고 일어나면 7시 40분. 아들을 깨우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학교 '출근'준비를 해서 보내고 나면 8시 30분. 후다닥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대충 머리를 감고 도서관으로 향하면 이미 피곤이 어깨에 한가득 내려앉아 있다.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10일간 업무과제 해결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과연 파워포인트에 한 타자 쳐 보지도 못한 내가 포트폴리오를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강산이 한 번 별할 동안 잠들어 있던 머리를 깨워 나는 업무과제를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되었든 좋다. 오랜만의 두근거림과 그래서 생긴 홍조가, 개미 똥구멍만큼의 가능성이, '야 너도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 좋다! 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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