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뭐라도 끄적이다 보면, 다시 기회가 찾아올까요?
오랜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다는 것부터가 도전이었다. 고요한 도서관의 분위기는 어떻고.
도서관에서 열공 중인 사람들이 실은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나처럼 마지막일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중일수 있겠다 생각을 하니 앉아있는 등짝마다 측은함이 느껴졌다.
자리를 어디로 잡을까 신중하게 둘러보았다. 뭘 한 가지 하게 되면 그걸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서 첫자리가 중요했다. 노트북을 꼽을 콘센트가 바로 옆에 있는, 창가 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창틀에 커피 보틀을 올려놓기도 편했고. 좁은 책상이 맘에 들었다.
아니 이건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학생들 틈에 뭔가 될 것도 아닌 아줌마가 넓은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는 것도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트북 하나 딱 올려지면 끝나는, 좁은 폭의 책상을 선택하는 게 맘 편했다. 메모할 작가 수첩_내가 작가였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말해주는 것 같아 애정하는_을 펼치고, 업무과제 프린트물을 펼치고, 한쪽에는 포트폴리오 관련 서적을, 그 위에는 업무 관련 프린터물을 올렸다.
업무과제는 얼핏 보기엔 양이 적어 보였지만, 막상 달려들고 보니 한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 대본을 쓸 때, 1분 분량의 대본을 쓰는데 적어도 1시간 이상이 필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다큐 때문에 며칠 밤을 지새우고, 씻으러 집으로 들어가서는 울면서 옷을 갈아입고 5분 쪽잠을 자고 다시 나오고 그랬었지... 아 옛날이여~
내가 도전한 경력직은 ux관련 부문이었는데,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이 그렇게 신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사전을 찾고 유의어를 찾고 그러다 보니, 한 문장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학교엘 갔다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각은 3시 30분경.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6시간쯤 되었다.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이 속도 대로라면 14장이나 되는 업무 과제를 10일 안에 해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은 날짜와 남은 업무과제 장수를 세어 과제 분배를 했다. 오늘은 3문제 풀기, 내일은 4문제 풀기..... 최소 이틀 전에는 전체 완료를 하고, 하루 동안은 수정을 하고, 마감 하루 전날에는 담당자에게 보내기로.
그런데 정말 웃긴 게 도서관에서 뭔가 집중을 좀 할라치면 그렇게 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아니 평소에 연락 없던 사람들도 왜 전화를 하는 건지. 첫날에는 전화받느라 오가는 게 너무 눈치가 보여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점심을 먹느라고 잠깐 티브이를 틀었다가... 헛.
어쨌든 수험생처럼 밥 먹고 도서관 가고를 반복하길 며칠. 머릿속이 과제 생각으로 틈 없이 꽉 차 터지기 직전이 되자, 반항의 세포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니 어차피 경단이 오래라 안될 거 뻔한데, 과제할 필요가 있나? 열심히 해도 안될걸 뭐 하려 해?
하지만 안되더라도 마무리는 하고 싶었다. 그래야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을 테니까.
과제가 그렇게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을 동안, 나의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 그것이...
컴퓨터에 파워포인트가 깔려 있는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어르신급인 내 노트북이 얼마 전 큰 병을 앓아 돌아가실 뻔 한 걸 심폐소생으로 겨우 살려 놓지 않았던가. 파워포인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치할 것인가부터 난관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 노트북에 파워포인트가 깔려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뭔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팝업창이 떴는데 무시하고 작업했더니 저장이 되었다.
10일 안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겁을 먹었는데 다행히도 채용 담당자가 업무 과제를 보낼 때 "포트폴리오보다는 업무 과제 위주로 평가할 계획이니 포트폴리오에 많은 공을 들이기보다 기본에 충실한 정도면 된다"라고 코멘트해 놓은 걸 발견했다. 캄사합니다~~~^^
포트폴리오 표지를 어떤 느낌의 디자인으로 할지 결정을 하고 하나하나 만들어 갔다. 아마도 초등학생이 방과 후 컴퓨터 교실에서 미리 캠버스를 열어 ppt 제작 과정을 배우는 그것 보다도 형편없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파워포인트를 '독학'했다. 사실 그때는 내 포트폴리오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초등생 발표 자료보다 못할 그 수준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확 달아오를 만큼 창피해지지만.
포기!. 어차피 안될 거 하면 뭐 해. 그냥 포기할래.
그래도~ 사람일 모르는 거다~ 내긴 내 봐야지~
하루에도 열두 번 했던 포기가 배추로 따지면 백 포기는 되지 싶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집안일은 고사하고 가족들 저녁은 밀 키트로 대충 때우는 날이 늘어났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들. _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수혜자인가? _집중이 잘 되는 날이면 저녁 시간, 남편이 퇴근해 올 때까지 도서관에서 버텼다. 그러다 보니 아들에게 제대로 된 간식을 챙겨줄 수 없었고, 아들의 공부도 봐주지 못했다. _그러니 아들은 수혜자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을꼬! 핸드폰 못 만지게 하는 엄마는 없지, 감자깡에 마이쮸에 엄마가 평소 제한하는 과자도 간식 핑계로 맘껏 먹을 수 있지.
김칫국 제대로 먹는다고~ 아니 슬슬 걱정도 되는 거다. 지금 과제한다고도 이렇게 생활이 엉망이 되는데 내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 아들 관리가 전혀 안 되겠구나. 집안이 아주 난리가 나겠구나... 하고 말이다. 아들은 이제 학원으로 돌리면 되고, 간식은.. 용돈을 주어 사 먹는 걸 알려줘야 하나... 마음이 앞서갔다. 안될 거라고 입으로 말은 하면서도 마음속으론 기대가 되었나 보다.
드디어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보고 또 보아도 진전이 될 것 같지 않아 업무과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 마감 날 오전. 보내고 나서 메일이 잘 도착했는지 십분 단위로 열 번은 열어본 것 같다. 어쨌든 마감일은 금요일이었고, 그날 저녁부터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말을 즐기기로 했다. 세상이 참 오랜만에 아름다워 보이더라. 큰 대회에서 상을 받고 나면 느껴질 법한 벅찬 감정과 후련함이 몰려왔다. 우습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을 일이야? 오랜만에 일을 한다는 느낌, 머리를 쓴다는 느낌이 이렇게 좋을 일인지. 그저 그동안 똥덩어리 되어가던 굳은 머리가 스트레칭을 끝내고 다시 무언가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보람이 느껴졌다.
열흘 동안 긴장하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그런지 주말 내내 잠이 쏟아져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당연히 엄마가 늘어져 있는 동안 아들의 핸드폰 오락 시간은 절정을 이루었고!
정말 나에게 기회가 오는 걸까?
과제를 보내고 난 후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 가슴이 콩닥거렸다가 이내, 그럴 리가 없지 하는 현실감에 시무룩 해 지곤 했다.
채용 담당자가 알려준 채용 스케줄에 따르면, 2차 과제 완료 후 2주 안에 결과가 발표되고 합격자는 과제 발표와, 임원 면접과, 인사과 면접을 거치는 채용과정이 이어졌다. 2차 과제 제출 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2주가 지나도록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니 불합격이라도 문자 한 통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라도 최근 경력이 없는데... 안 쓰지... 대기업에서 이런 경단녀를 쓰겠어?
나는 뻔한 결과였다고 쿨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속에 실망감이 몰려왔다. 안될 거 알았고, 안될 거라 생각했으면서 기대는 왜 했던 거지?
나는 채용 담당자에게 용기를 내어 메일을 보냈다.
'아직도 연락이 없다는 것은 불합격의 의미인 것인가요? 불합격 여부라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담당자는 곧바로 메일로 "아직 담당부서와 협의 중이며 금주 내로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라고 안내해 왔다.
'오예~ 아직 결과가 나온 게 아니었어. 아직 기회는 있으~'
얼마 전 물 부족으로 시들어 축 처진 수국에 물을 부었더니 금세 빳빳하게 되살아난 경험이 있는데, 내 마음이 딱 그랬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나를 좌절의 늪에서 금세 일어서게 만들었다.
담당자에게 문의한 게 월요일. 금주 내로 라고 했으니 금요일 전에는 어찌 되었든 끝이 날 것이었다.
' 기대하지 마. 기대하지 마. '
난 속으로 나에게 매 시간 이야기했다. 안 될 가능성이 99프로 이상일 것이다. 괜한 기대로 들떴다가 더 큰 좌절을 맛보지 말자.
목요일이 될 때까지 난 메일을 열어보지 않기로 했다.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메일이 오면 연동된 핸드폰으로도 알림이 올 것이었다. 그러니 굳이 애써 메일 확인을 하지 말자.
금요일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무심결에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두둥~ 메일 표시가 있었다.
'2차 과제에 대한 결과를 알려드립니다'로 시작하는 문구를 보는 순간. 메일을 열어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다. 나, 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불합격.
"귀하가 가진 역량과 노하우는 훌륭하지만 금번 채용에서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어 너무 아쉽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두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들이 국어 문제집의 지문을 읽을 때 보다 더 대충. 메일을 읽어보고 창을 닫았다. 늘 지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는 아들에게 제대로 읽으라고 잔소릴 하는데, 대충 읽어도 중심 내용만 파악하면 되는 거였다. ㅎ...--;;
이럴걸 예상했으면서, 합격하면 어쩌나 김칫국을 마셨네 내가. 당분간 김칫국은 끓이지도 않을 거얏!
' 그래도 도전 자체로 즐거웠잖아. 무언가 한다는 것이 설레었잖아. '
'그 마음을 잃지 말고, 다시 무언가 하기 위해 뇌를 깨우고 있자. '
대기업에 도전을 해봤으니 됐다고... 맘으론 쿨하지 못했지만, 머리로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남편에겐 굳이 결과를 말하진 않았다. 내 표정만 보아도 아마 알아차렸겠지.
10년 만의 나의 대기업 경력직 도전기는 이렇게 실패로 끝이 났다. 그래도 나는 다시 기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침마다 _9시 땡 맞추진 못하더라도_도서관에 출근하기로 했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브런치 스토리를 열었다.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며 얻게 되는 불안과 괴로움을 무언가 하고 있다는 위안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뭐라도 쓰다 보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오늘은 불합격이지만 내일도 계속 불합격이진 않을 거니까. 뭐라도 쓰다 보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