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경력자 재취업에 경단녀는 왜 안 되는 걸까?
다음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시청이었다.
접수한 서류는 잘 받아보았으나, 최근 3년의 경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3년의 경력이 필요했던가요? 전 못 봤는데요?
담당자는 친절하게, 공고 몇 쪽을 살펴보면 적혀있다고 했다.
다시 찾아보니, 시부렁— 진한 글씨도 아니고 작은 글씨로 적혀있더라.
우선, 경력증명과 관련하여할 말이 많다.
보통의 직장인들이 경력을 증명할 때, 건강보험자격득식확인서나 재직증명으로 하는 것과 달리, 작가는 재직증명이 되지 않는 프리랜서다.
일하던 프로덕션이 폐업해 증명할 수 없거나, 회사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작가가 재직증명을 해 달라고 읍소를 해야 겨우 받아낼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을 주변 작가들에게 익히 들어왔다.
친한 작가는 일전에 코로나 관련 지원금을 받을 때, 그 문제로 담당자와 여러 번 다투었다. 결국 방송국에서 고료를 받은 통장 입금 내역을 제출하고 경력을 인정받았다 들은 터였다.
그래서 나도 일전에 은행에 가서 고료 입출금 내역을 뽑아 놓았다.
10년 동안 거쳐간 프로덕션이며 방송국이며 거기서 받은 입금 내역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나하나 일일이 입금자를 지정해서 내역을 뽑기에는 직원한테 미안해서 그냥 입금내역을 일괄 뽑아버렸다. 그랬더니, 남편이 남자친구 시절 무슨 연유로 입금하며 '사랑한다'라고 남긴 메모나, 하다못해 막내시절 열정페이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민망했다. 그래서 이건 최후의 보류로 두었다.
그리하여 경력증명은 우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송국부터 시작해 봤다.
오랜만에 일했던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고, 담당자를 수소문했다.
네, 작가님. 확인서 발급 신청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누구 엄마 소리 대신 십 년 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이 어색하기도 하고, 반가워 어깨가 으쓱했다.
담당자는 확인서 발급 신청서를 작성해 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담당자가 보내 준 기재 양식에 칸을 채우고 메일을 보냈다.
경력직 공고를 늦게 본 상황이었고, 방송국에 연락을 했을 때는 공고 마감 하루 전이었다.
급한 사정을 얘기하고 미안하지만 빠른 처리를 부탁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답장이 오질 않자 초조했다.
그 사이에 방송작가 협회에도 연락하여 집필증명서를 받았다.
정회원으로 있는 작가협회에서는 경력증명에 어려움을 겪는 작가들을 위해, 협회 자체에서 집필 증명을 해 주고 있었다.
작가협회원은 입회 당시 원고 쓴 경력 4년 이상을 원천징수 영수증 등으로 확실히 증명해야 가입자격이 된다. 그러니 협회원이라 함은 최소 4년 이상의 작가 경력을 증명하는 셈이다. 또 협회에서 해 주는 집필증명은 재방료 등이 발생한 내역을 중심으로 기재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확실한, 최소한의 경력증명인 셈인데 이를 인정해 주는 곳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오로지 재직증명서만 인정받는 더러운 세....
다행히 방송국에서 오후 늦게 답신이 왔다. 경력증명은 집필 내역서와 집필 외 내역서로 나눠져 있었다. 나도 기억 못 하는, 내가 막내 작가시절 참여했던 작품내역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내가 일한 경력의 절반도 안 되는 내역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과거를 증명해 주는 서류를 눈으로 받고 보니 그저 좋았다. 아무도 내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고, 과거 나의 노력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단 말이다. 그런데 서류 한 장에 이렇게 기분이 으쓱하고 좋을 일인지, 어이없어 피식 웃음이 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최종 직인을 찍어 준 본부장이 옆 팀 피디였던 것을 확인하고 속절없이 흘러버린 나의 시간이 또 속상했고.
시간이 없기도 했거니와, 프로덕션 쪽은 아마도 경력증명을 받기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았고, 공고에 보았던 경력 요건이 방송국에서 일한 경력만으로도 충족이 되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경력증명을 마무리하고, 최종 지원서를 제출했었다. 작가협회의 집필증명까지 더했기 때문에 충분할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담당자는 너무 오래 전의 경력이라며 최근 경력을 달라는 것이었다.
혹시 최근 3년 안에 일 년이라도 뭐 한 거 없나요?
순간 화가 났다. 경력직 지원 가능한 공고도 오랜만이었거니와, 가슴 쿵쿵 뛰며 얼굴 벌게져라 서류를 준비했던 나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된다니.
가장 최근의 것을 보내주세요. 어쨌든 지금 이 상태로는 서류 심사 하시는 분들에게 못 올려요.
가장 최근 것이라 해 봤자 프로덕션에서 근무한 것이다. 그래봤자 10년 전인데, 최근 3년 내 경력 증명하라면서 응?
없습니다. 경력자 공고이길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지원했는데요, 꼭 최근 경력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그럼 경력단절 여성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건가요?
공고 내용을 꼼꼼하게 읽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만, 그냥 그런 기준을 정한 것 자체에 화가 났다. 아마도 내게 전화를 건 그 담당자는, 서류의 기준을 만드는 데 일도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얘길 나에게 듣는 게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나는 담당자와의 통화 후 그래도 내가 가장 마지막에 일했던 프로덕션과 접촉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폐업한 프로덕션이다. 무슨 수로 경력증명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바로 고료 입금 내역이다. 사랑한다는 메시지와 열정페이가 고스란히 찍혀있는 그, 통장 입금내역서 말이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최근 경력증명을 하려 애쓰는 내가 생각할수록 애처롭게 느껴졌다. 어차피 최근 3년 경력이 아닌데 이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예상대로 경력증명은 ‘재직증명’이 아닌 관계로 인정되지 않았고, 최근 경력이 전혀 없는 관계로 서류에서 탈락되었다.
이게 제 최선이에요. 증명이 안 된다니 유감이네요. 그리고요. 경력자인데, 최근 경력이 없다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전거 오랜만에 탄다고 못 타는 거 아니고요.
난 서류 심사에 일도 힘없을 담당자에게 볼멘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니, 나라에서 경단녀의 재취업을 위해 일자리센터에서 담당자를 만들고 재취업 교육이니 뭐니 시킨다고 하면서 왜 정작, 경력직에 경단녀는 응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냔 말이지! 이거 너무 아이러니 아닌가!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 아니고 경력보유여성이라고!
시청 앞에서, 국회 앞에서 일인 피켓 시위라도 해야 하나?
경단녀에게 최근경력 묻지 마라! 경단녀도 경력자다! 경력자다~경력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