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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안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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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Oct 22. 2023

벌써 일년


아빠가 하늘로 가시고 난 뒤,

가족들 누구도 서로의 앞에서 펑펑 운 적이 없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배려심 때문일까,

누구 하나 울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울음바다가 될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울고, 아빠를 그리워했다. 


나는 매일, 하루에도 몇 번 아빠가 보고 싶고, 아빠가 없는 이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고갤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아빠의 첫 기일이 다가오고,

울컥하는 마음이 솟구쳐 어떤 날엔 설거지를 하다가 앉아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좀 펑펑 울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많이 운다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줄어들진 않더라.


아빠에게 갖다 드릴 꽃다발을 만들고,

아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ktx 표를 예매하고, 

짐 가방을 쌌다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한동안 앉아서 멍~ 하니 있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난 아빠가, 한 달을 먹지 못하고 힘들게 숨을 쉬던 아빠가 가여워 

자꾸 눈물이 났다. 

막상 가족들을 만나서는 울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슬프다 내색하지 않고 꾹꾹 참았다. 


아빠를 만나러 가는 날. 하늘이 참 푸르고 맑았다. 

우리 아빠 시원한 가을 하늘 아래 잘 쉬고 계시구나... 



아빠에게 만들어 간 꽃다발을 선물하고, 한참 인사를 했다. 

아빠 집이 잘 있는지 모두들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아빠 집에 있는 가족사진들을 보며 이야기도 나누고, 

아빠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아빠를 추억했다. 


문득 매년 아빠와 아빠 기일에 함께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빠 앞에 모였다. 

평일이었던 관계로, 중학생 고등학생인 조카와, 

직장인인 남편은 함께 가지 못했다. 



납골당을 다녀온 후,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우린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우리 먹을 것만 하자"라고 말을 하면서 

어느새 한 상 거하게 차려졌다. 


"제사상이 아니라 잔칫상 차리는 것 같지?"


누구 하나 힘들어하거나, 찌푸림 없이, 음식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어 열심이었다. 

슬프거나 울기보단, 아빠에 대해 기억하고, 추억하는 마음들이 가득했다.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베트남인인 올케가, 제사상을 차리고 싶어 해서 

뼛속까지 크리스천인 엄마가  이해해 주기로 했다. 

실은 엄마도, 남편의 일이 되고 보니,

배고파 하며 한 달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먹고 간 남편 생각에 

이것저것 차리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올케가 아빠 밥과 국을 차리며, 

"아버지 배불리 많이 드세요" 했다. 

"아빠는 천국에 가셔서 여기 안 오셔." 

라고 말해주었지만, 배고팠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있어 다들 그대로 두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모두 앉아 추도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때마침 회사에서 달려온 남편 덕분에, 

그래 그날, 아빠가 마지막까지 너를 기다리셨지. 

너를 보고 "커피 한잔해라" 농담을 하시고, 30분 후쯤 돌아가셨잖아. 

오늘 네가 안 왔으면 서운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그날의 아빠를 또 한 번 되새겼다. 



언니와 형부는 교회를 다니지 않고, 남동생은 목소리가 어눌한 편이고 하여 

추도예배 진행은 어쩌다 내가 맡게 되었다.

나는 아빠의 첫 추도예배를 잘 진행하고 싶었다. 아는 것 없는 나일론 신자이지만, 

차분하게 엄마 교회 목사님께서 준비해 주신 순서대로 예배를 진행했다. 

믿지 않는 남편, 형부가 군소리 없이 잘 따라주어서 참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엄마께 대표 기도를 부탁했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차분했다. 

일 년 전 그날, 아빠의 사망 선고를 받고, 하나님께 아빠를 천국으로 잘 안내해 달라고 기도하던,

엄마의 애달프던 목소리가 오버랩 되면서, 더 슬퍼 눈물이 났다. 


엄마는 어떻게 참고 있을까. 


훌쩍, 훌쩍, 

언니도 나도 눈물 콧물을 훔쳤다. 그렇게 우리는 또 서로를 위해 눈물을 참았다. 


 "살아서 맛있는 거 많이 해 드렸어야 하는데, 이렇게 차려 봤자 소용이 없네."


추도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시작하며 엄마가 한숨 섞인 말씀을 하셨다. 

남편은 밥을 먹자마자 또 3시간을 달려 숙소로 돌아가고, 

언니와 형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만 엄마 집에 남았다. 


고요한 밤. 

혹시라도 엄마가 울면 어떡하지.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히도, 아침 일찍부터 아빠 추도예배 준비로 몸 부지런히 움직였던 엄마는

피곤함이 몰려와 일찍 잠이 드셨다. 

엄마가 잠을 잘 자서 다행이다. 


다음날 오전, 아들과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툭! 눈물이 쏟아졌다. 

벌써 일 년이라니.

숨만 쉬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신지 일 년이 지났다. 


우리는 각자,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빠가 어디 여행이라도 가신 거라 생각하며 산다. 

전화기에 저장돼 있는 아빠 전화번호도 지우지 못했고, 

아빠 사진만 모아둔 폴더는 열어보지도 못한다.

언젠가는 훅! 하고, 아빠를 보낸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무너질 날이 있겠지.

그래도 아직은 아빠가 하늘로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여전히 아빠의 죽음이 의문이고.

하나님의 뜻이 알 수가 없고.

아빠의 목소리, 말투, 표정 하나하나 또렷하게 기억이 되며,

임종 면회를 갔을 때 만져본 아빠 손의 피부도, 그 감촉도 생생하다. 

아아...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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