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냉장고는 2008년에 한 식구가 되었다. 그때는 자주색에 금색 꽃무늬가 그려진 냉장고가 유행했는데, 화려하지 않은 냉장고를 고르느라 애먹은 기억이 난다. 주부생활은 1도 모르던 때라 용량도 보지 않고 최대한 저렴한 것으로 구입했다. 살림을 하다 보니 고 적은 용량의 냉장고는 늘꽉꽉 채워져 과부하가 걸리곤 했다.
뭐, 비우고 살면 해결될 문제였겠지만, 한 번씩 양가 부모님들께서 철에 맞춰 먹을 것을 한 보따리씩 보내시면, 냉장고 안에 넣을 곳이 부족해 테트리스 쌓는 기분으로 음식을 쑤셔 넣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 동안 고장 없이 제 할 일을 해 오던 아이였다.
저 냉장고는 그러니까, 가끔 설거지를 하면서 설움이 폭발해 엉엉 울고 마는 내 뒷모습을 모두 지켜본 녀석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냉장고 안 부속품들이 틱! 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내부 서랍장의 손잡이가 부서진다던가, 칸막이가 부서져 청 테이프로 붙여야 하는 곳이 생겨났다. 연식이 오래돼 부속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십 년 지났으면 그럴 만도 하지, 이참에 바꿔~
가끔 냉장고 얘기가 나올 때 우리 집 냉장고의 속사정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새 냉장고로 교체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속이 부서져라 제 할 일을 해 내고 있는 이 냉장고가 기특했다. 게다가 새로운 모델의 냉장고를 알아보고 가격을 따져보고 하는 그 모든 작업들이 귀찮기도 했고.
아직 쓸 만 해, 완전히 고장 나면 바꾸지 뭐...
나는 한쪽이 부서져 잘 열리지 않는 냉장고 서랍을 발로 차 턱! 하고 닫기도 하고, 반대로 뻑뻑한 서랍을 힘껏 당기다가 한쪽을 부셔먹기도 하면서 냉장고를 만만하게 이용했다. 그러다 최근, 냉장고 손잡이 중간 부분이 턱!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하필이면 TV가 고장 나 새로 계약을 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돈 들 일이 줄줄이 이어져서 그랬는지, 생각지도 못한 손잡이가 똑 떨어져 그랬는지, 나는 부서진 냉장고 손잡이를 쳐다보다 어이가 없어 실실 웃었다. 지금이야 중간 손잡이만 부서지고, 손잡이의 위, 아래는 붙어 있지만, 언제 그 마저도 떨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곧 냉장고를 열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내 말에 뭔가 턱턱 사기 좋아하는 남편이 '주말에 냉장고 바꾸러 가자'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웬일인지
바보~ 냉장실을 못 열면 냉동실 문을 연 다음 냉장실 문을 열면 되잖아~
한다. 하하하, 남편 천잰데? 우리는 냉장고 문을 여는 방법을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었다.
그래도 왠지 정든 물건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게 좀 싫기는 해.
우리는 냉장고를 조심 조심해서 쓰다가 완전히 부서지면 (실은, TV할부가 끝나면--) 그때 새로 사자고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버려야 할 것들을 내치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산다. 케케묵은 감정들도, 버려내야 할 쓸데없는 자존심도, 유쾌함을 거부하는 슬픔의 기운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못 떨쳐 냈다. 어떻게든 버텨내고 싶어서, 참고 참다 보면 이겨 내 질 것 같아서.
그런데 이제 속이 다 망가져 곧 수명을 다해가는 냉장고를 보니 이러다 정말 끝이 오면 너무 애처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쳐 쓸 수 없다면 이제 그만 새것으로 바꾸어야지. 과거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어떻게든 회복시키려 애쓰지 말고, 그냥 더 이상 아니다 싶을 땐 다 떨쳐내고 새로운 인생을 써 내려가는 게 현명한 거라고.
딩동
며칠 후, 당황스럽게도 냉장고가 배송됐다. 남편이 시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냉장고 고장 난 이야길 했던 모양인데, 시어머니께서 턱! 하니 냉장고를 통 크게 쏘셨다. 냉장고는 내 뜻과 상관없는 용량과 디자인으로, 오직 시어머니 맘에 드는 것으로 선택되어 배송이 되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냉장고 배송 전 날, 이전 냉장고 속에 들어있던 음식들은 모두 꺼내놓아야 한다는 얘길 듣고, 아침 일찍부터 집에 있는 아이스 백은 죄다 꺼내어 얼음팩을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 속에 들어있던 음식을 꺼내 담았다. 고 작은 용량의 냉장고 속에 얼마나 많은 음식들이 들어가 있던지, 커다란 아이스 백 3개로도 부족해 김장할 때 쓰던 다라까지 총동원됐다.
그 많은 음식을 꺼내 담다 보니 마치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갖가지 먹다 남은 음식들이 내 감정의 쓰레기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먹다 남긴 음식들을 모두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통을 깨끗이 씻어 한 곳에 모았다. 버린 음식이 아깝진 않았다. 여름철이라 냉장고 밖에서는 곧 상해버릴지 모르는 것들이었다. 깨끗한 몸으로 쌓여 있는 빈 반찬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내 맘속의 케케묵은, 쓸데없는 감정들도 이렇게 쉽게 버리고, 산뜻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우리 집에 있던 낡은 냉장고가 집 밖으로 나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속이 비워진 냉장고를 확인 한 기사는 바로 냉장고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반면, 새 냉장고는 부피가 너무 큰 관계로 집안에 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 들어오는데 필요한 조건들, 얘를 들면 냉장고의 깊이나 가로길이, 현관문의 넓이, 중문의 높이 등을 측정하지 않고 주문 한 터라 한 번에 냉장고가 들어오질 못했다. 처음에는 중문을 떼어내고, 그다음은 냉장고 문짝을 떼어내고 그러고서도 높이가 아슬아슬해 냉장고를 눕혀서 현관을 통과하느라 기사분들이 진땀을 흘렸다. 전실에 있던 자전거며 신발장까지 죄다 꺼내어 옮기고, 미니 이사를 하고서야 냉장고는 거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낡은 냉장고가 있던 자리에 하얀색 도화지처럼 깨끗한 새 냉장고가 힘들게 자리를 잡았다. 세련되고 깔끔한 외모를 자랑하는 덩치 좋은 녀석이었지만 왠지 낯설었다. 용량이 너무 큰 냉장고는 키가 작은 내게는 엄마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저 위쪽 선반 깊숙이 무언가를 넣고 쓸 수가 없으니 용량이 커 봤자 무용지물. 어쩌면 적은 용량의 이전 냉장고가 내게 찰떡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시각이 다 되어 나는 허겁지겁 새 냉장고에, 빼놓은 음식들을 채워 넣었다. 많이 버린 후라, 냉장고 속에 들어갈 것들이 많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닫는 방식이 이전보다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윙~ 하고 한 번씩 돌아가는 모터 소리가 꽤 시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원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세상 어색한 일 아닌가. 차차 적응되겠지. 하지만, 새 냉장고는 들썩이는 내 등을 보는 일이 많지 않길 바란다. 설거지하며 울기보다는 콧노래 부르며 엉덩이 실룩 거리는 일이 더 많기를. 먹다 남은 음식물에 미련이 남는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꽉꽉 채워두지 않기를. 속 안에 빈 공간이 생겨 조금은 헐거워 지기를. 그리하여 커다란 모터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새 냉장고처럼 나의 인생도 무겁지 않고, 활기찰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