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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Jul 05. 2023

카드로 생사를 확인하는 사이인가요?

마흔다섯_ 내 명의 카드를 사수하고 싶다 느낄 때.


내가 커피 사 주고 싶은데, 네 카드로 긁고, 내가 계좌이체 해 주면 안 될까?


 커피 4잔을 주문하면서 K가 말했다.


 이번달에 결제해야 할 카드값이 오버됐나? 생각한 나는 그냥 내가 커피를 쏘기로 했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고 보니, K가 1500원짜리 커피 네 잔, 그러니까 6천 원의 카드값이 부담스러워 그랬을 것 같진 않았다.

 

남편한테 내 일과를 들키는 게 싫어.


K의 은 예상 밖이었다. 결혼 직후, 남편과 통장을 합치면서 불필요한 카드를 없애기로 했고, 월급을 받고 있는 남편 명의  카드만 남기고 자신의 카드는 다 없앴다는 것이었다.  사용한 카드 내역이 남편의 핸드폰으로 알림이 가는데, 점점 그 게 부담스럽게 느껴단다.


아니 그럼, 네 카드가  한 장도 없어?


 일을 쉰 지 10년이 훌쩍 넘은 나는 여태 남편과 통장을 합치지 않고 따로 관리하고 있다. 일할 때 만들었던 내 카드로 물건을 사고, 아이 학원비를 결제한다. 현재 내 벌이가 없으니 남편에게 매달 월급의 80%를 전달받고 있는데, 남편은 남편대로 집 담보 대출금과 각종 할부 금액들을 부담하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매달 월급을 받아 써야 한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자발적으로 일을 쉬고 있는 게 아니면서도, 돈을 벌지 못하는 자=능력 없는 자라는 어이없는 논리가  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매달 남편이 주는 월급으로 생활비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도 절대 남편에게 SOS 하는 법이 없었다. 부부사이에 무슨 자존심을 세우냐고 하겠지만, 말한다고 해서 월급쟁이에게 없는 돈이 어디서 뚝 떨어질 리도 없고, 무엇보다 남편에게 돈이 부족하다고 더 달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내 자존심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세상일이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쌀이 똑 떨어져 밥 걱정을 해야 하던 때도 남편은커녕 친정 식구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도 손 벌리지 않았다. 그 사실은  힘든 고비를 지나온(물론 지금도 또 다른 힘든 고비에 직면해 있지만)  나의 영웅담 중 하나로 혹은 자부심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러니, 내 입장에선 남편의 카드로 생활하며 그것도 긁는 족족 남편에게 알림이 가는 상황에 사는 K가 이해되질 않았다. 지만, 일반적일 것 같은 나의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나도 남편 카든데?


그날 모임에 나온 4명의 여인들 중 나만 빼고 모두 남편 명의의 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언니는 신경 안 쓰여?


 K는 카드 긁을 때마다 남편에게 전달되는 사용내역 문자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동네 엄마들이랑 만나 커피숍에서  자기가 결제를 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온 이다.


오아시스가 어디야? 네가 쓴 거 맞아?


 남편의 생각 주머니에서 오아시스가 어떤 곳으로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오아시스가 커피숍이고, 자신이 지금 커피숍에 있다는 걸 확인시킨 다음에야 남편은 '네가 카드를 잃어버려서 누가 긁은 건가 했지'라며 멋쩍게 전화를 끊었다고.


감시받는 것 같더라고? 생각해 보니 내가 매일 카드를 긁을 때마다 그 사람은 마치 CCTV 보듯이 내 동선을 확인하고 있을 거잖아? 음... 이 여자 마트에 갔군, 음... 이제 커피 한 잔 마시나 보군, 헐~ 다이소는 왜 이렇게 자주 가? 하고 말이야.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일거수일투족을 비 자발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K는 특히 남편에게 자신이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살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싫단다. 사실, 밖에 나가 일하는 남편은 가정 주부의 삶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다는 걸 모르지 않냐고. 나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도 대부분은 아이들을 위한 친목도모 내지는 사회생활의 일부일 때가 많은데 남편은 어디서 수다나 한판  떨며 편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 아니냐고.  

 

그래... 그렇겠다.


나는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추며 K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뭘 그리 예민하게 굴어. 물어보는 남편이 문젠거지~ 한 두 번 겪고 나면 전화 안 해.
뭐, 카드 쓰는 걸로 생사 확인 하는 거지~


세 살 위 동네 언니가,  얼음이 꽉 채워져 있는 아. 아를 빨대로 쪽쪽 마시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의 카드로 살아가는 삶이라... 언니의 말처럼, 카드 쓰는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걸까. 냥 익숙해지면 될 문제인가. 카드 사용 내역 알리미를 없애버리면 되는 걸까??


 

 우리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를 양육하면서 자연스럽게 경력단절의 길을 걷고 있다. 벌이가 없으니 카드 만들기가 어렵고, K와 같은 이유로 카드를 정리해 남편 카드로 사는 주부들도 꽤 많다.

 비 자발적 실업자. 비 자발적 행동 보고자. 그 삶엔 왠지 지금도 찾기 힘든 내 자아가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아서 상상하기도 싫다. 그저 남편명의의 카드로 생사 확인을 하는 관계도 생각해 보면 참 정 없고.

 

 늘따라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내 명의의 카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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