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지 않아도 돼. 괜찮으면 다 가져갔으면 좋겠어.
얼마 전 j가 볼록하게 둘둘 말린 비닐팩 한 뭉치를 건넸다. 그 안에는 귀걸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몇 년 전 우연히 보았던 j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날 교회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처음 들어가 본 공간이 낯설어 쭈뼛거리다가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듯 소심하게 앉았다. 나중에 들어온 j가 정색을 하며, 거긴 간식을 올려둬야 할 자리라고, 엉덩이를 대고 앉으면 어쩌냐고 한 마디 했다. 인사도 나누지 않은 사이였는데, 할 소리 다 하는 그녀가 내게는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걔, 그런 애 아니야~ 정말 착해~
동네 교회 모임의 리더인 언니가 j는 정말 착한 아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좋지 않은 편견을 갖고 말았다. 그러고 몇 년이 흘러, j가 우리 구역 모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j는 나와 동갑내기로 아들을 키우고 있으며 아이의 피부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다. 피아노를 전공했고, 바느질을 좋아한다. 나의 처지와 관심사가 많이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j는 내게 호감을 보였다. 알면 알수록 그녀는 선입견이란 얼마나 쓸데없는 감정인가 증명해 주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정말 '그런 애'가 아니었다.^^ 우리는 오전 한가한 시간에 만나 커피를 마시며 급격히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불록한 비닐팩 하나를 주었다. 그 안에는 귀걸이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평소 액세서리를 세트로 골라 착용하고 다니며 꾸미길 좋아하는 j였기에, 싫증이 난귀걸이를 하나 나눔 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맘에 드는 게 있는지 봐바. 하나 고르지 말고, 이왕이면 다 가져갔으면 좋겠어.
번쩍이는 아이들 중 한 가지를 고르기 힘들어하는 내게 j가 재빨리 말했다.
이 많은걸? 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귀걸이들이 진짜 순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당 몇 천 원 짜리라고 하더라도 꽤 많은 돈을 주고 구입했을 귀걸이를 공짜로 받는다는 게 살짝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다시 돌려주기에는 혹시나 j가 오해를 하거나 선의를 거절당해 상처를 받진 않을까 고민되었다.
어정쩡 귀걸이 뭉치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걸이들은, 무심하게 비닐팩에 담긴 듯했지만, 실은 하나하나 개별 비닐팩에 신경 써 담겨 있었다. 마치 꾸안꾸 패션처럼, 신경 쓴 듯 무심한 듯 그렇게 담겨 있는 귀걸이를 보니, 내게 부담 없이 선물을 주려던 j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 마음을 하나하나 꺼내 보았다.
사실 나는 덜렁이는 귀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심플하게 귀에 착 붙는 귀걸이를 선호하고, 액세서리라곤 겨우 귀걸이를 가끔 하는 정도다. 그러니 화려하게 달랑 거리는 j의 귀걸이들이 착용하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처음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번쩍이는 그 아이들을 자꾸 꺼내어 보게 되었다.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귀걸이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부자가 된 듯 마음이 차오르기도 하고, 살짝 설레기도 했다.
다음날, 괜히 나갈 일도 없는데 씻고 화장대 앞에 섰다. 평소엔 뚱뚱해지고 늙어버린 내 얼굴 보는 게 싫었는데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의상에 맞는 귀걸이를 골라보았다. 그냥 보는 것과 착용했을 때 옷에 어울리는 귀걸이는 달랐다. 나는 귀걸이를 뺐다 꽂았다 하며 신경 써 의상에 맞는 귀걸이를 선택했다. 귀걸이를 착용하자 얼굴이 화사 해 보였다. 그러자 화장이 하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눈썹을 그리고 옅게 눈 화장을 했다. 괜히 나가고 싶어졌다.
시간 되면 커피 한 잔 할래?
나의 문자에 j는 '내 그 맘 알지~' 하는 뉘앙스로 답했다.
나오고 싶구나?
나는 j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j도 예전엔 자신을 꾸밀 줄 몰랐단다. 아이 둘을 연령생으로 키우며 독박 육아에 시달리던 어느 날, 우울증이 온 줄도 모르고 매일 울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이러다간 곧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 운명처럼 우연히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액세서리들이 j를 살렸다는 것이다. 액세서리를 착용하며 어울리는 옷을 찾고 화장을 하고, 그렇게 자신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우는 횟수가 줄었단다. j는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더 꾸미기 시작했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서 하루하루가 설레고 즐거워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전문 상담가들의 [우울증 극복, 이렇게 하세요~]라는 제목의 너튜브에서나 들을법한 얘기를 실 사례로, 코앞에서 생생하게 듣게 되다니...
아마도 j는 블루 블루 한 내가 과거의 자신처럼 보였던 것 같다. 예쁘게 하고~ 웃고 다니라고 말하는 j의 진심이 내 마음에 밝은 물감 한 방울을 톡! 떨어뜨렸다.
행복하게 살자. 나를 사랑하면서.
j는 그날도 내게 귀걸이, 반지 세트를 한가득 내밀었다.
다음날 아침, 난 또 거울을 보고, 옷을 갈아입고, 옷에 맞는 귀걸이를 골랐다. 귀걸이 덕분에 보기 싫던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지면서 기미가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래서 화이트닝 제품을 구입하게 되고, 팩을 하는 일이 생겼다. 아들 사진 일색이던 내 핸드폰에 드디어 내 셀카가 한 장 두 장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실은 보여 줄 사람도 딱히 나갈 곳도 없어 핸드폰에 남겨두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를 꾸미고 나면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j에게 내가 받은 것은 귀걸이가 아니라, 기분 좋은 하루하루였다.
마흔다섯,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은 j에게 내가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