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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Jun 14. 2023

한밤, 생리대 원정대!

마흔다섯_달거리를 안 한 지 15년 차 입니다만.

같이 한 바퀴 돌자~ 운동도 할 겸!
헐~ 나는 그것도 안 하는 여잔데?

  가끔 저녁을 많이 먹어 죄책감이 드는 날, 밤늦게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정예의 멤버가 있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쯤 되는데, 편의상 나이 순으로 번호를 매긴다면, 1호와 2호는 나보다 언니들로 각각 딸이 둘이고, 3호 나는 아들 한 명, 4호는 아들 둘, 5호는 딸 하나, 아들 하나다.


 밤 9시경 5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얼마 전  생리대바우처가 지급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청소년의 건강한 성장 지원을 위해' 정부에서 생리대 바우처 지원을 하고 있는데, 보통 6개월분 씩 지원이 된다고 한다.

 5호의 초등 5학년 딸이 생리를 시작해 지원금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드디어 지원금을 받게 된 것. 그리하여 이미 바우처 경험자인 1, 2호 언니들과 밤에 모여 생리대를 구입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편의점에 가서 생리대를 사고, 바우처로 들어온 지역 화폐로 결제하면 되는 거야. 동네 한 바퀴 같이 하자~~
헐~ 나는 그거 안 한지 15년 차인데~ 나더러 그걸 사러 같이 가자고?


 나는 아이를 출산할 때 출혈이 심해 죽을 뻔하다 자궁적출을 하고 겨우 살아났다. 때문에 달거리를 할 일이 없으니, 아이를 임신했던 시기까지 포함하면 생리를 안 한 지 15년쯤 되었다. 나는 잠깐, 어이가 없어 웃다가 곧 운동도 할 겸 동네 한 바퀴를 같이 돌기로 했다.


저쪽 편의점부터 돌아보자.


 1호, 2호, 5호가 비장한 각오로 모였다. 마치 생리대를 찾아 나선 원정대처럼, 셋은 신중하게 어디부터 어떤 방향으로 돌아볼 것인지 의논한 다음 아파트 앞 편의점부터 털어보기로 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마침 생리대 1+1 행사 중인 상품이 많았다.


오오~ 그거 찾던 거야! 팬티형!

 1호 언니가 환호성을 질렀다. 생리를 시작한 초등생 딸이 일반 생리대보다는 팬티형을 편해한다고. 그런데 아이 사이즈에 맞는 소형이나 중형은 잘 없더란다. 첫 시작부터 득템이다! 1+1에다가 찾던 형태의 생리대까지! 딸 엄마들은 편의점에 진열된 생리대를 거의 싹쓸이 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계산대에는 셋이 계산하러 올려 둔 생리대가 탑을 쌓았다. 남자 손님이 음료수를 사러 들어오자, 셋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리대를 사는 게 뭐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만, 아닌 밤중에 생리대로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아니지. 헛.

 계산을 기다리며 1호 언니가 주머니에서 커다란 장바구니를 꺼내 탁탁 털었다. 이어 2호 언니도 커다란 장바구니를 꺼내었다.


내가 또 준비 철저하게 하는  사람 아니냐!
아하, 이래서 경험이 무서운 거야~ 난 준비를 미처 못했네...

 5호는 언니들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개의 생리대는 무겁진 않아도 부피가 꽤 나갔다. 금세 각자의 장바구니가 한가득 찼다.

 그러고 마는가 했더니 한밤의 생리대 원정대는, 다음 편의점을 향해 돌격했다.


원하는 형태나 사이즈가 잘 없어.
있을 때 많이 사 둬야 해.
저번엔 옆동네까지 걸어갔다가 왔어.


 1, 2호 언니들의 생리대 찾아 삼만리~ 경험담이 쏟아졌다.


왜 꼭 편의점에서 사야 해?
편의점에 없을 때 다른 걸 사면 안돼?
아이용이 없으면 어른용을 사고, 아이건 사비로 사면되지 않나?


 생리대 지원금을 받아 볼 일도, 생리대를 살 일도 없는 나는 질문을 쏟아냈고, 아들만 둘인 4호는 아들도 혜택을 받고 싶다~ 아들 거시기 수술할 일 있으면 지원해 주냐며 껄껄껄 웃었다.


 편의점 서너 군데를 방문하고 보니, 정말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았다. 마지막 편의점까지 털고 나자, 생리대 원정대 셋의 장바구니는 마치 보부상의 자루처럼 거대한 꾸러미가 되어 있었다. 한 밤, 퉁퉁한 자루를 품 가득 안고 있는 셋의 모습이 문득 재밌어 피식 웃음이 났다. 딸 엄마들, 야밤에 고생한다!


오늘도 보람되는구먼.
한동안은 끄덕 없겠다.


아들맘 3호와 4호는 함께 생리대 원정대에 합류한 대가로 시원한 음료수 한 잔을 얻어 마셨다.



혹시 기분 나쁘거나 속상하진 않았어?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5호에게서 밤늦게 문자가 와 있었다. 오잉? 기분이 나쁘고 속상해야 하는 일이었나? 잠깐 생각해 보았다.

아니?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속상한 것도 없었는데? 생리를 하는 이에겐 생리를 안 하는 이 눈치가 보였나 보다.


 달거리를 안 한다는 것? 너무 편하고 좋기만 하다. 가끔, 혼자 있는 아들이 너무 외로워 보일 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에 대해 생각하면 살짝 아쉬운 맘이 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다만, 그런 몸인 관계로 다른 사람보다 갱년기가 조금 빨리 올 수 있단 말을 주치의로부터 들은 바 있다.

 요즘 흔한 갱년기 증상이 내게도 나타나고, 여기저기 몸이 아픈 곳이 늘어나서 그게 좀 서러울 뿐.


속상하긴 하네...


 한밤의 생리대 찾기 원정은 이른 갱년기로 서러워진 내 마음과 여기저기 골골하니 아픈 내 몸의 컨디션만 재확인시켰다.  


 폐경을 맞고도 딸들의 생리대를 찾아 한 밤 원정을 떠난 두 언니의 마음은 어떨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속상할까? 아쉬울까? 지긋지긋할까? 이래나 저래나 생리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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