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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Jun 01. 2023

아침 일찍 대타로 그린마더를 했습니다.

마흔넷_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에 관하여...

올해가 마지막이야, 부탁 좀 할게...


 친한 언니의 카톡을 받았다. 화요일이 둘째 딸아이의 교통안전지원단 활동 차례인데, 대신 좀 서 달라는 것이었다. 언니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고, 언니의 딸은 둘이다.

아니 왜? 그냥 담임한테 못한다고 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하던데, 왜 너한테 부탁해?


 울 아들 반이 아닌데도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날 보고, 동네 엄마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그러게... 언니는 왜 그랬을까?



 

 아이들의 등굣길에는 사거리가 있다. 아침에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 교통지도가 꼭 필요하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모든 학생의 어머니들이 공평하게 일 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녹색어머니를 하도록 정해져 있다. 출근이나 기타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알바를 써서라도 자리를 지키도록 하는 게 동네 분위기. 하지만 언니의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을까? 장애인인데,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하는 일은 학교에서 편의를 봐주지 않을까?

일 학년 때 선생님이 안된다더라고...


 첫 아이 일 학년 때 선생님께  얘기했다가, 누구라도 자리에 서야 한다는 얘길 들었단다. 그래서 다음 학년부턴 담임에게 아예 사정 얘기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가 걱정해...

 

 아이가 다른 엄마들은 다 교통을 서는데, 우리 엄마만 교통을 못 선다고 걱정을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걱정 말라고, 엄마가 해결한다고 큰소리 떵떵 쳤단다. 그러고 나서, 고민이 많았다고. 

 매번 알바를 고용하는 것은 비용의 문제도 있거니와 쉽지 않았던 모양이고, 남편은 너무 낯을 가려서(이 대목은 이해가 가질 않지만... 다른 속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킬 수가 없고, 어쩔 수 없이 아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단다. 언니의 그 '누군가'가 내가 된 것은 6년 전, 언니의 첫째 딸이 2학년, 둘째가 1학년 때 일이다.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는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그때는 우리 아들이 언니의 첫째와 같은 나이여서,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시기였다. 아침마다 아이의 희귀 질환 때문에 치료도 해 줘야 했고.


 녹색어머니는 8시 30분부터 9시 10분까지 정해진 자리에서 교통 지도를 해야 하는 데, 학교로 가서 녹색 어머니회 조끼와 깃발을 챙겨서 지정 자리에 30분까지 서려면 집에서 8시 10분엔 나가야 한다. 그러니 교통 당번인 날, 나는 새벽같이 아이를 깨우고, 치료하고, 밥을 챙겨주고 미리 옷을 입히느라 정신이 없다. 학교에 도착하기 전 이미 기운이 빠진다. 그러니까, 아픈 아이 치료로 바쁜 아침을 보내는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아는 언니가, 나에게 부탁을 하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 년에 두 번, 언니의 사정을 위해 내 사정을 외면하기로 했다. 우리 아들의 당번까지 그러니까 나는 매년 (코로나가 발생한 첫 해는 제외하고) 3번을 녹색 어머니가 된 것이다.  

 올해는 큰 애가 중학생, 둘째가 6학년이다. 녹색 어머니도, 마지막인 셈이다.

부탁 좀 할게...


 언니의 카톡을 받고 난 흔쾌히 알았다고 얘기했다. 예전에야 내 상황이 좋지 않았다지만, 아들도 다 컸고, 이제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늘 언니 대신 선 자리는, 아이들의 이동량이 많은 아파트 앞이었다. 그런데 맞은편 횡단보도를 맡은 엄마가 끝까지 나타나질 않았다. 차량이 우회전하여 아파트 쪽으로 들어오는 자리라 위험했다. 나는 거의 어벤저스 급으로 내 자리와 맞은편 자리를 왔다가 갔다 했다. 한 번은 유턴을 하다가 녹색신호에 걸려 횡단보도에 멈춰 선 택시를 몸으로 막아서 아이들의 길을 건너게 지도했다.

나 이러다 다치면 보험적용 되는 건가? 대타도 보험적용 되나?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타로 선 자리라고 해서 대충대충 하는 성격은 또 아니다. 어쨌거나 누구를 대신하는 자리라면 책임감 있게 해야지. 내 자리에서 교통사고는 있을 수 없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며 여러 번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해 왔더라.

의사. 간호사를 대신해 매일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치료한다. 항생제를 발라야 할 자리와, 보습제를 바를 자리를 결정하고 때에 따라 드레싱을 해 주기도 한다. 매 순간 나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치료가 어떤 땐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이의 상처에서 피가 많이 나는 날에는 마음이 많이 힘들기도 하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진 아들의 헤어도 내가 담당했다. 이 또한 피부 문제로 조심스러워서... 미용을 배운 적은 없지만 다행히 손재주가 나쁜 편은 아니어서 유아전용 이발기를 사서는 아들의 머리카락을 내가 잘라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못해 나는 어릴 때부터 아이의 학습을 담당하고 있다. 논술, 수학 지도사 자격증을 따면서 학원 선생님을 대신하고, 친구를 못 사귀는 아들의 친구역할까지... 내 몸은 하나이지만  하루에도 여러 번 누군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해야 했던 내 삶은, 생각해 보면 참 피곤했다. 


 많은 엄마들이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학원 선생님 대신~ 헤어 디자이너 대신~ 요리사 대신~ 이런저런 자리, 누군가를 대신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있겠지? 그러다 지치고, 자신의 삶을 찾고 싶어지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찾고 싶은 나, 오롯한 내 삶이란 게... 뭐지??




이번이 끝이라 속이 후련하다. 고생 많았어~


 녹색어머니 마치는 시간즈음, 언니에게서 카톡이 왔다. 피식. 아직 십 분 남았는데...  노란색 안전봉을 둘둘 말고 학교로 복귀할 준비를 하는데 왼쪽 엉덩이가 얼얼했다. 실은 새벽에 자다가 왼쪽 장딴지 근육이 갑자기 뭉쳐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뻐근해서 잠깐, 못 간다고 해야 할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아침에 갑자기 다른 사람을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아이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인데 함부로 노쇼 할 순 없었다. 

 새벽에 뭉친 근육의 피곤함이 다리를 타고 쭉 올라와 엉덩이, 허리까지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 몸으로 오늘따라 말 안 듣고 초를 다투어 길을 건너는 아이들을 제재하느라 애썼다. 햇볕까지 직통으로 받아 기미가 마구 솟아나는 느낌이었다지. 끝나고 나니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절로 생각났다.


 커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거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고, 아들이 먹던 아침밥은 절반이 남겨져 있었으며, 과일도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재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아들은 늦장을 부리다 황급히 등교했겠지. 엄마가 있었다면  잔소리해서 밥도 다 먹이고, 과일도 다 먹였을 텐데... 아쉬운 맘이 잠깐 스쳤다. 엉망진창인 식탁에 앉아 오늘따라 진하게 내려진 아. 아를 벌컥벌컥 마셨다. 씁쓸했다. 얼얼해져 오는 허리를 부여잡고 오늘 누군가를 대신한 시간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래도, 내 몸이 건강하여 몸이 불편한 누군가를 대신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닌가. 밥 조금 못 먹고 간다고 애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앞으로 누군가를 대신해야 할 때, 이왕이면 내 상황과 컨디션이 좋을 때였으면 좋겠다고. 파스를 허리에 척, 붙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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