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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May 31. 2023

크롭이 너무해~

마흔다섯_쇼핑에도 용기가 필요한 나이

 며칠 후면 아들이 속해있는 시립 합창단의 정기 연주회가 열린다. 꼭 정장 차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깔끔한 차림으로 가고 싶었다. 아침 일찍 아들이 학교에 가자마자 옷장문을 열어 보았다. 아니, 나는 어둠의 자식이던가~ 죄다 검거나 회색 일색인 옷장 안 풍경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색은 그렇다 치더라도 얌전하게 입을만한 셔츠 하나 보이지 않았다. 최근 내 옷장에 추가된 흰색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이 입다가 작아진 티셔츠다. (이제 아들이 나보다 키가 커지면서 아들의 옷을 물려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건 좋은 거지... 암, 아들이 쑥쑥 자라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아들을 사 줬지만 입지 않아 작아진 고무줄 청바지도 내 옷장으로 넘어왔다. 내 몸에 꽉 끼니라 과연 입고 외출이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이렇게 아들에게 물려받은 옷가지와, 늘어진 검은색 티셔츠들이 즐비한 옷장 안을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 바라보았다. 

 아니, 작년 여름엔 도대체 뭘 입었지? 

 어떻게 죄다 허름한 티셔츠뿐이지? 안 되겠다. 내 이번엔 기필코 점잖은 옷 하나 장만하고 말리라! 



 커피 한잔 내리고, 핸드폰을 들고 비장하게 식탁에 앉았다. 자주 눈팅하던 옷가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정장 느낌이 나는 린넨 소재나 링클프리 원단의 바지를 하나 고르고, 블라우스나 셔츠 혹은 재킷 중에 한 가지를 골라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난관은 바지 사이즈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얼마 전에 살이 급격히 찌면서 미듐 사이즈 바지들이 작아졌다. 어떤 바지들은 숨을 들이 참고 잠그면 되었지만, 늘어난 뱃살이 벗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 금세 잠금버클을 열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라지 사이즈 바지는 빌려 입은 옷 마냥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옷가게에서는 보통 미듐이 허리둘레 27~28인치, 라지가 29~30인치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옷에 따라서 맞거나 맞지 않거나 하는, 미듐과 라지 사이즈 그 중간쯤의 몸이 되고 보니 사이즈 안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바지 하나도 선택하는 데, 여간 고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가서 입어보고 사는 것이 좋겠지만, 언젠가부터 매장에 가서 옷을 고르고 사는 것이 너무 어색하더라. 돈도 써 본 놈이 쓰고, 옷도 사 본 사람이 잘 산다지 않던가~ 너무 안 사다 보니 쇼핑 자체가 어색한 웃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거의 인터넷으로 옷을 사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몇 날 며칠을 보고 또 보고, 고민하고 고민하다 에잇, 모르겠다. 하며 쇼핑 창을 닫기가 일쑤였다.  하루종일 쇼핑을 하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끝이 났을 때는 허비한 시간이 너무 아깝고 나 자신이 참 한심해 보여 우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필코, 성과를 낼 것이다. 아니, 쇼핑하는데 무슨 각오 식이나? 싶지만, 쇼핑에서 어지간히 어려움을 맛본 나로서는 작심하고 달려들어야 뭐라도 시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을 다 마시도록 나는 바지를 선택하지 못했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 사지 싶어 상의를 우선 골라보기로 했다.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켜고, 다시 앉아 집중했다. 상의를 대충 훑어보다가 하, 나는 또 한 번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옷들이 죄다 크롭이다. 아니 유행이야 이해한다지만, 미시족의 옷까지 죄다 크롭이 점령했을 줄 몰랐다. 나는 뱃살이 많이 나온 아줌마이고, 최소한 Y존이 가려지는 길이의 상의를 선호한다. 엉덩이까지 가릴 수 있는 풍덩한 사이즈면 더 좋고. 그런데, 예쁘다 싶어 클릭해 보면, 모두 길이가 아무리 길어봤자 골반을 덮는 정도의 수준이다. 아니, 그 유행 너무하네, 나 같은 아줌마도 좀 생각해 줘야지~ 


 투덜거리며 나는 쇼핑을 계속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내 장바구니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러 사이트를 기웃거려 보아도, 짧다, 짧아!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있어도 길이가 짧아서, 괜찮은 색감의 옷도 길이가 짧아서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들 크롭을 입지 못할 이유는 뭔가,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다. 쇼핑을 하다 말고 나는 옷장을 열어 만만한 티셔츠 하나를 꺼냈다. 크롭티들의 기장만큼 대충 티셔츠의 아래를 접어 옷핀으로 고정하고 바지 위에 입어 보았다. 전신거울로 간 나는 그만 웃지도 못할 만큼 심각하게 올록볼록한 내 몸뚱이를 보고 놀라, 얼른 옷핀을 풀어 셔츠를 내렸다. 휴... 한결 마음이 편했다. 


 가끔 거리에서 볼록한 배에 아랑곳하지 않고 크롭티를 입거나, 뚱뚱한데도 셔츠를 바지 안으로 입어 넣은 사람들을 보면 눈을 힐끔 거리게 된다. 보기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 용기가 부러워서다. 적어도 내게는, 내 배와 엉덩이를 드러내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산 후 15KG의 살이 쪄 버린 몸이 15년이 지난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될까? 언제부턴가 내 몸뚱이를 거울로 보는 게 싫고, 자존감마저 발바닥 저 아래로 붙어버린 기분이다. 사실 지금 나에겐 더 큰 사이즈의 새 옷보다는 다이어트가 더 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연주회에 예쁜 차림으로 가고 싶었던 나의 욕망과 쇼핑에 성공해 보겠다던 내 각오는 결국, 못나진 나의 몸과 못난 나의 생각만 재 확인한 채 끝이 났다. 

 아... 정말 입을 게 없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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