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

그녀를 산 남자

by 밤얼음

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는 척하며 일부러 소리를 냈다. 평소보다 더 크게. 문 앞에 귀를 댔다. 몇 초, 바깥에 모든 신경을 걸었다.


거실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상한이 준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뒤집었다. 투명한 포장지 속 수건들이 미끄러지듯 쏟아졌다.


똑같다.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장을 열었다. 하얀 수건들이 가지런히 접혀 있다. 색도, 브랜드도. 내가 새로 교체한 수건들과 확실히 같다.


시선이 세면대 위에 멈췄다.


새 치약.

내가 바꿨었나?


손을 씻었다. 습관처럼.

비누폼이 새것처럼 가득 차 있다.


'정말 손 안 씻으셨어요?'

상한의 말이 떠올랐다.

'바꿔야 할 것 같아서요.'

두 말이 겹쳤다.


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확인하던 건, 내가 본 것일지도.


전화가 울렸다. 아까 호텔에서 만났던 남자, 구진국.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느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실아, 집이지? 선물 준비했는데 잠깐 나올 수 있지?"


나올 수 있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연인 흉내 몇 번에 권리가 드러난다.


서로가 당연해지고, 그 당연함이 다시 당연해지는 관계.


구질구질해.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에 숨이 트였다.

짧은 경적. 구진국이었다.


"영실아, 이거."


조수석에서 내 상체만 한 쇼핑백을 꺼냈다.

큼지막한 명품 로고.

곧바로 뒷좌석 문으로 손이 간다.


"자, 이것들도."


차문이 열리고 같은 쇼핑백들이 연달아 나온다.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 딱 그 정도.


"아까 내가 그런 말 해서, 아직 기분 안 풀린 거야?"


선만 안 넘었으면 더 해줬을 텐데.

연인놀이.

구진국이 정장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결혼하자, 영실아."


미쳤나 봐. 혼이라니.

그것도 집 앞, 길 한복판에서.


"우리 너무 오래 만났다."

"그래. 지금 결혼 안 하면 네가 없어질 것 같아."


"오빠."

"응, 영실아!"


"그만 만나자."


그 얼굴이 멈칫했다.


"...우리 당연히 결혼할 사이 아니었어?"


우리. 당연히. 사이?

착각도 정도껏 해야 귀엽게라도 봐주지.


"이 반지 몇 캐럿인지 알아? 부족하면 더 올릴게."

"다신 연락하지 마."


눈은 높고, 눈치는 낮고.

가치는 거기까지다.


그때였다.


시야 한쪽이 조용히 식었다. 하얀 편의점 봉투를 든 남자. 상한의 형이 멈춰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쳤다.


"오빠, 내가 오늘 진짜 피곤하거든?"

"기다릴게. 연락만 줘."


오피스텔 현관 앞. 카드를 대던 상한 형의 뒤를 붙잡았다.


"저기요."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가 고개를 돌린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입구 옆 벤치.

나란히 앉았다. 거리를 둔 채.

봉투 안에서 캔들이 살짝 부딪혔다.


"그거 맥주면, 하나씩 마셔요."


말없이 캔을 하나 꺼내 뚜껑을 따 내게 내밀었다.


큰 손.

하얗다.


한 모금.

쓴맛이 목을 긁고 내려갔다.


"그쪽 동생, 대체 뭐예요?"


대답은 없었다.


"그쪽도 이상한 거 알아요?"


역시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 이름 뭐예요? 그쪽이요."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공백을 깨는 낮고 느린 목소리.


"태강."


상한의 형.

이태강.


캔 바닥에 남은 탄산이 작게 울렸다.


"지금 둘이... 뭐 해?"


상한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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