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그녀를 산 남자

by 밤얼음

사랑. 믿음. 약속.

그딴 거. 개나 줘버려.


"미쳤어?! 영실이 때릴 데가 어딨다고 뺨을 때려. 그 곰발바닥 같은 손으로!"


윤부남의 목소리가 복도를 갈랐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들이 내렸다.

상한. 그리고 그 옆의 남자.


시선이 위에서 멈췄다.


복도 조명 아래,

얼굴이 반쯤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창백한 피부, 정돈된 흑발.

온기 없는 눈매.

차가운 공기.


상한의 형이었다.

이 장면은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혼하자고! 애들도 다 컸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방해를 해?"


사랑.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었니.


와이프의 시선이 아까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꽂혔다.


"왜 내 남편이니?"


피곤하다.


"남자가 그렇게 많은데도 부족해? 저 남자도, 저 남자도 다 네 남자 아니니?"


그 시선이 상한을 지나, 자연스럽게 그의 형에게 멈췄다.


"저기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잘못 봤다고?"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가 여우짓을 하니까 안 그래도 미친 인간이 더 미친 거겠지."


윤부남이 끼어들었다. 목에 핏대까지 열심히 세운 채.


"정리?! 누구 마음대로 정리를 해!"


정리.

관계에 따라붙는 말.

사랑을 아무리 외쳐봐야

끝에 남는 건 사랑이 아니다.


정리하는 쪽.

정리당하는 쪽.

난 전자를 택했을 뿐.


심이 아닌 선.

마음 말고 조건.

닫혀 있어도 사랑이라 부를 수는 있다.


"영실이, 너 저자식 때문이야?"


윤부남의 손가락이 상한을 가리켰다.


"저놈이 어떤 놈인 줄 알아?

내가 똑똑히 봤다고.

호수에서도, 분리수거장에서도

밤마다ㅡ"


"아저씨."


상한의 목소리가 윤부남을 막았다.

윤부남이 관자놀이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몸이 앞쪽으로 튕기듯 쏠렸다.


"뭐어?! 아저씨이? 너랑 나랑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핏발 선 눈이 뒤집히기 전에, 와이프의 손이 다시 날아갔다. 이번엔 윤부남을 향해.


"입 다물어. 이 미친 인간아."

"봐봐. 내가 이런 여자랑 산다니까."


벌개진 뺨에도 윤부남은 웃고 있었다.


"그만합시다."


상한보다 낮고, 감정이 빠진 톤.

상한의 형.


"결말은 다 자기 방식입니다."


그 말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와이프가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다들 똑같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윤부남의 목소리가 끝까지 따라왔다.


"영실아! 기다려! 나 진짜 몇 달만ㅡ"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모든 소리가 끊겼다.

복도에는 정적만 남았다.


"영실 씨,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지.


상한이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손에 쥔 종이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영실 씨, 이거요."

"뭐예요?"

"수건이에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버린 수건.

그걸 가지고 있던 남자.

쓴 흔적을 확인하던 시선.

정체 모를 피.


그리고.


상한의 옆.

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훑는다.

아주 느리게.


눈이 마주쳤다.


확실히,

인생 참 재밌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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