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버리면 그만

되, 물림

by 밤얼음

재연은 그날 이후로 약국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 약은 팔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밤이 되면 다른 문을 열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기도 전에 술 냄새가 먼저 쏟아졌다.


쾌쾌한 냄새에 섞인 욕설은 물 같았다.

삼켜버리면 그만인.


"돈 받고 술 따르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꼿꼿해?"


재연은 피우던 담배를 술잔 속에 가져갔다. 담배 끝이 술에 닿으며 천천히 꺼졌다.


"누가 앉히래?"


순간, 남자의 손이 재연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고개가 젖혀졌고,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


"요즘 세상에 아가씨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남자는 이를 악문 채 손을 풀었다.


"네 주제부터 알아. 이 진상새끼야."


재연은 얼음통에 손을 넣어, 얼음 하나를 집어 물었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건 골목의 그 남자였다.

그는 재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통로 끝, 룸 문이 열렸고 재연은 소파 위로 밀쳐졌다.


"야, 너 계속 그딴 식으로 장사 말아먹을 거야?"


치맛단을 내리며 재연은 몸을 일으켰다.

치워지지 않은 술병 하나를 제 쪽으로 당겼다.


"갈 데도 없는 년 구제해서

사랑까지 해줬더니 은혜를 모르네."


"사랑?"


재연이 웃으며 잔에 술을 부었다.


"오빤 사랑을 잘못 배웠네."


"이게 미쳤나, 초저녁부터 사랑 타령이야.

넌 뭐 사랑을 배워서 그 꼴이냐?"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못 배웠지.

그러니까 이 꼬라지로 오빠 옆에 붙어있는 거 아니겠어?"


재연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목의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래. 너 일하기 싫댔지?

네 소원대로 한 일주일만 쉬자."


시계는 눈치도 없이 천천히 움직였다.


다시 골목으로 나왔을 때 밤공기는 차가웠다.


재연은 벽에 기댄 채 몸을 떨어뜨렸다.

주저앉은 그림자로, 다른 그림자 하나가 포개졌다.


인성이었다.


그는 말없이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았다.

손에 쥔 약상자가 열리며 연고와 소독약, 밴드가 차례로 드러났다.


약이 상처에 스며들며 재연의 짧은소리가 새었다.


팔.

그다음엔 다리.

그리고 입술 옆, 상처 위에 다시 얹힌 상처.


재연이 인성의 팔을 잡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날이 선 그녀의 말에 인성은 잠깐 손을 멈췄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밀어내고 다시 약을 발랐다.


밴드가,

붙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너도 뭐, 나랑 한 번 자고 싶어?"


빈정대는 말에도 인성은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재연과 눈을 맞췄다.


"그냥"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스쳤다.


"그냥 계속 신경이 쓰여서."


눈빛이 흔들렸다.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누구의 눈빛이든,

누가 먼저든.

그들에겐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요."


그의 말에 재연의 눈이 다시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재연은 입에 붙어 있던 밴드를 천천히 떼어냈다.

팔에 붙은 밴드도, 다리에 붙은 것도.

하나씩 하나씩.

치료된 상처들을 다시 열어젖히는 것처럼.


"이렇게 살아야... 나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지막 밴드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살아야지만.

아이한테 덜 미안할 것 같으니까."


재연의 말에 인성은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찬 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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