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 물림
약국 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열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신재연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입술에 남아 있던 상처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엔 인성이 문을 열었다.
재연은 주머니 안에 넣은 손만 꼼지락거렸다.
"상처... 잘 아물고 있네요."
"...약국에도 커피는 있죠?"
인성을 기다리며 약국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긋난 것 하나 없이.
그 사이로 인성이 걸어 나왔다.
커피를 내미는 손길마저 부드러웠다.
"믹스예요. 제가 좋아하는."
재연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인성이 건네준 온기가 손마디마디에 스며들었다.
속이 쓰게 내려앉았다.
재연은 주머니 안에서 움직이던 손을 꺼냈다.
손바닥을 펼쳐 인성 앞으로 내밀었다.
막대사탕 하나.
"사과맛이에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제가 젤 좋아하는."
인성은 사탕을 받아 껍질을 벗겼다.
단맛이 퍼졌다.
"진짜 사과맛이네."
그 위로, 커피의 쓴맛이 천천히 덮였다.
재연이 한참을 컵 가장자리만 엄지로 문질렀다.
"아이가 있었어요."
인성의 손이 멈췄다.
재연의 시선이 컵 안으로 떨어졌다.
"지금은... 좋은 곳에 있겠죠.
그렇게 믿고 살아요."
말끝이 낮아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재연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인성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재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인성의 말이 조용히 흘렀다.
"...아이도 엄마가 아픈 건 싫을 거예요."
재연의 발이 문 앞에서 멈췄다.
"...저보다 오빠 맞죠?"
툭, 말을 던지듯 남기고 문을 닫았다.
골목 위에 달빛이 희게 젖어 있었다.
그 빛 아래 멈춰 숨을 한 번 들이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달빛을 등지고, 번쩍이는 간판 아래로 몸을 집어넣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가 비릿해졌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재연을 위아래로 훑었다.
"뭐 하다가 이제 기어들어와?"
남자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재연 쪽으로 던졌다.
가슴팍에 맞은 라이터가 바닥으로 굴렀다.
"불 좀 붙여봐. 오랜만에."
재연은 라이터를 내려다봤다.
집어 들고, 그 앞에 섰다.
남자가 입꼬리를 올린 채 얼굴을 들이밀었다.
재연은 가방을 열어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남자의 것이 아닌, 자신의 입에 물고 있던 것에.
라이터를 그대로 남자 앞에 내려놓았다.
"흘리지 말고 잘 챙겨. 오빠꺼."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뒤틀린 목소리가 돌아서는 재연의 등에 눌러앉았다.
"난 내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는 사람이야."
재연이 멈췄다.
"잊었나 본데.
신재연 네 집은 밖이 아니라 여기야."
비열한 웃음이
지하보다 더 아래로 재연을 끌어내렸다.
"그 약사 놈. 네가 내 애까지 뱄던 거 아냐?"
"그 입에... 함부로 내 아이 올리지 마."
떨리는 재연의 손가락 사이로 향이 피어올랐다.
웃음이 복도 끝에서 되돌아왔다.
천장을 치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화려한 옷들이 무너져 쌓인 룸 한쪽.
재연은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그대로 무너졌다.
손끝 가까이까지 타들어온 불씨를 바라봤다.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문질렀다.
불은 꺼졌지만,
아까 인성의 그 말은 꺼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과는 늘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 나무는 집 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