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꽃이 봄에 피지는 않는다.

005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낙법(落法)

by 호야 H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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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쓸모


한 세계의 붕괴는 또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준다. 심연 속에서 열성적인 사제으로서 살아가던 삶의 관습을 버린지도 몇 개월이 흘렀다.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공부해왔는데, 지상으로 올라와 세상을 바라보니 새롭게 발견해가는 시야가 넓어진다. 지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이다. 그들은 돈을 모아 스스로에게 사랑스러운 대접을 해주거나 서로를 쓰다듬는 열애를 하거나 혹은 높은 자리가 주는 권위를 통해 힘에 굴복하게 만든다. 이는 분명히 인간이 인격적으로 살아감에 마땅히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간혹, 누군가를 도우며 자신의 존재를 채우는 보기 드문 사람이 발견하게 될지 기대했는데, 아직 만족할 만한 인물은 찾지 못했다.


한편, 신탁 안에서 세속적인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 세상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마주하기도 한다. 작은 세계였던 알이 균열을 내는 나에게 세상에 대한 이해를 깨우치게 해준 사람. 그는 소녀의 작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결정에 커다란 일조를 했다. 그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밭을 갈고 꽃을 피워내는 작업을 함께 배우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상에 대해서 아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숙한 부분도 있었다. 그의 옆자리는 항상 소녀의 차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상에 올라와 느끼던 불안감이 소년과 함께 있으면 잦아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작업을 하다가 모른 것이 생기면, 소녀가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소년에게 물어보고는 했다. 그에게 설명을 듣고 있으면 모든 것을 전부 잊고 입가에 미소만 가득 번졌다.


소년이 소녀에게 열어준 시야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바로 돈이다. 돈이 흘러가는 양상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확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운영하는 모든 공연, 강의, 전시와 같은 유희와 다채로운 정보들은 모두 돈을 지급하며 수월하게 얻을 수 있는 가치였다. 돈은 소녀 안에 있는 무능감이나 불안한 갈증은 단숨에 해소시켜주었다. 따라서 돈은 지상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만큼 효율적인 가성비로 행복감을 안겨주는 도구도 없었다. 그가 열어준 두번째 시야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이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서점에 가면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는 했다. 특히, 그의 충중한 외모가 주는 깊은 감명, 그 이상의 쓸모는 아루 말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녀서 눈을 즐겁게 만들고 소비되는 것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는 표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대중들로 하여금 울림을 주는 본질적인 의미을 함축하고 있어야 마땅히 그 쓸모를 다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움 안으로 지속적으로 초대할 수 있는 정체성이 함축되어야 하며, 뜻이 담긴 "의"와 사람들을 이끄는 "미"의 조화를 적절히 이루는 것이 끝없는 과업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정립해주던 심연에서의 고통은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이라면,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십자가에 대속하신 예수님의 삶이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아름다움인가.


그러나 이 사랑이 다시 나를 다치는 게 하는 것이 두려워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심장이 뛰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눈이 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바로 나였다. 아마 그에게 온전히 빠져든 후에 어떤 아픔이 찾아올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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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고통이 몸을 생성하는 것이다.


상처의 조화로움을 찾기 위해 심연과 지상 사이의 범위를 허물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살아가던 일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와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정리하고 정말로 이별을 했다고 여기게 된데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몸을 담았던 안식처를 떠나 마주하는 세상은 달면서도 오묘하게 쌉싸름한 맛이 났다. 이곳에서 느끼는 자극의 강도가 주는 피로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양상은 예상했던 기준보다 더욱 커다란 폭으로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에서 재즈 음악을 듣는 것과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를 맡으며 거친 욕설을 듣는 것 사이에서 수없이 복잡한 마음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없는 지상에서 적응하는 일은 예상보다 더욱 곤욕스러웠다.


내 안에는 해결되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내 안에 돌보지 못했던 상처받은 어린아이 말이다. 모든 것은 이 아이의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방황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는데, 심연에 내려가면 겉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멋진 언어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내가 드러나고 싶지 않았던 어린아이가 무능이라는 이름을 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전부 드러나 버리면 정말인지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바닥으로 내던지고 바닥을 붙잡게 만드는 약점이었다. 그렇기에 돈과 아름다움으로 지상에서의 삶을 안정적으로 구축해놓은 사람들은 신이라는 존재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기나긴 방황은 도무지 마침표를 찍을 여력을 주지 않았다. 무능한 자아의 해체, 영육과 정신의 붕괴에 징 지겹도록 끌려다니고 난 후에야 스며들었던 소년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결핍과 놀아주던 사람이었나보다. 이기적이고,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들을 담고 있던 사랑은 나에게 하여금 새 살을 돋게 했다. 나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해도 된다고 수없이 되새기게 하는 시간이었다.


심연으로 가는 시간은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도달하고 싶은 의지와 다르게 부실한 자아를 만나는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나를 얽매이게 하고 채찍질하며 더 나은 사람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무능한 나를 도와달라며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공간에서 벗어나서 일상이 주는 잠잠함을 느끼고 싶었다. 깊은 내면에 잠식해있는 아이는 여전히 떠난 소년의 흔적을 갈망한다.


방랑이란 목적지 없이 떠도는 것이며, 방황이란 언젠가 목적을 정할 때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방황을 길을 찾기 위한 목적성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방랑으로 시작되었던 시간이었다. 혼동하는 진동들만이 모여 언제 끝날지 모를 기나긴 방황의 마침표를 찍게 될 날이 찾아오기를.




여행자를 위한 서시/ 1997년 여름 류시화


나를 찾아가는 긴 여행 속

화려한 에펠탑은 보이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돈은 없더라도

길거리를 걸으며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에 의미를 찾는다면 되는 것이다.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을 열고 여행길을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을 속으로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배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적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아직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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