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200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하나는 "전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입니다. 첫 번째 고민은 아무리 작은 전쟁이라고 그 상황을 재현하는데 막대한 비용과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고민은 제작하려는 영화의 장르를 정하면서 동시에 감독의 의도가 어디를 향할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첫 번째 질문보다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작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원정을 굉장히 박진감 있고 웅장하게 그려냈음에도 개봉 당시에는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DVD로 출시된 감독판은 49분을 추가하여 내용적인 부분과 전쟁 영화로서 아쉬웠던 부분을 말끔히 해소해 주었습니다. 특히 캐락에서 펼쳐지는 기병 간의 전투는 속도감과 무게감을 동시에 살려내어 두 군대가 부딪치는 순간의 에너지를 극대화하였는데, 이는 왕좌의 게임 시즌 6 후반부에 벌어진 윈터펠 전투 이상이었습니다. 초반부에 숲 속에서 벌어지는 습격 장면과 예루살렘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전투 장면 역시 연출력과 박진감 면에서 지금까지 나온 어떤 영화와 비교해도 압도적이었고요.
그럼에도 제가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전쟁영화로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잘 해결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911 사태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대립을 그리고 있음에도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닌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하고 있고,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비극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노력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표현됩니다. 신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는 사람들, 그런 와중에서도 영주로서 책임을 다하면서 참혹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의 목숨보다 신앙적인 순결함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등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슬람이나 기독교 측의 수많은 인물들은 하나의 세력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결국은 각자의 목표 혹은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자기 파괴적으로까지 보이는 전쟁의 속성과 그 안에 내재된 혼란스러운 모습까지 잘 그려냈습니다. 특히 이슬람 측을 대표하는 살라딘(기산 마소드)은 단 한 명의 인물에 복잡한 내면을 응축하여 입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지키는 인물로 보이게 하네요.
사실 할리우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제작되는 전쟁영화는 자국의 역사를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자국의 인물들은 호의적으로, 적국의 인물들은 사악하게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뼈아픈 역사를 다루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인물의 성격을 단순하고 한쪽 면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결정하는 순간 전쟁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고통이 가려진 채 화려하고 거대한 액션 장면의 연속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공허하게 흩어진 화려함이 아닌 이 영화처럼 두 가지 고민을 잘 해결한 전쟁 영화를 다시 한 번, 가능하다면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