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Black Widow movie review & film summary (2021) | Roger Ebert>
인피니티 워를 끝으로 마블이 지난 10년간 이어져오던 대서사시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작품이 나왔음에도 한 단락이라고 한정지은 이유는 그 대서사시에서 주연들이 물러난 자리를 다른 캐릭터들이 그 이후에도 극장과 브라운관에서 착실히 채워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이드킥들의 향연 속에서 군계일학처럼 등장한 작품이 바로 아이언맨 2편부터 어벤저스의 마지막 편까지 활약한 블랙 위도우(스칼렛 조핸슨)의 단독 주연 영화입니다.
정작 영화를 보고 나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캐릭터는 따로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작품의 최후의 최후를 장식하는 캐릭터도 바로 '그' 인물이고요. 캐릭터의 매력이나 비중으로 봐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그런 안배가 영화 내적으로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향후 마블의 작품들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무덤 속으로 사라진 어떤 블랙 위도우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사정이 더 눈에 밣혔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조차 다음 작품을 위해 착실히 이용하는 마블의 섬세한 손길에 눈살이 찌푸려졌고요.
액션 장면만 놓고 보면 보자면 블랙 위도우는 볼거리가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중심은 액션보다 어떤 두 인물과 관련된 어떤 선명하게 어떤 주제가 자리 잡고 있는데 저에게는 바로 그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두 인물은 아주 강력한 악역인 '태스크 마스터(올가 쿠릴렌코)'와 블랙 위도우의 어머니였던 스파이이자 또 다른 위도우 멜리나(레이첼 와이즈)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하에는 영화의 내용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걱정되는 분들은 피하시길 권합니다>
<출처 : Rachel Weisz Didn't Discuss Melina's MCU Future After Black Widow (screenrant.com)>
이 작품은 세뇌당한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누군가를 해치는 삶을 살았던데 대해 적극적으로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바꿔 말하면 '선택할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명제를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내는데, 그중 첫 번째 장면이 블랙위도우와 그녀의 어머니로 함께 살았던 멜리나의 대화입니다.
멜리나는 아주 우수한 위도우(세뇌당한 암살자)로 영화 속 악당인 드래이코프 장군이 세뇌하는 기술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블랙 위도우는 멜리나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도움으로 더 많은 위도우들이 탄생하고 그 위도우들에 의해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멜리나는 위도우로써 길러졌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고 따라서 그녀의 행동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일축합니다. 즉, 누군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다른 선택을 할 자유가 있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출처 : Black Widow: who is hiding under the mask of Taskmaster? - Cinema News - DashFUN>
그런데 이후에 밝혀지는 태스커 마스터와의 이야기에서는 선택과 책임에 대한 관계가 달라집니다. 테스커 마스커는 드래이코프 장군의 딸로서, 블랙 위도우가 영화 속에서 드래이코프 장군을 암살하기 위해 이용했고 그를 죽이기 위해 부가적인 희생양으로 삼았던 아이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블랙 위도우는 그 일을 떨쳐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지막에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끔찍한 몰골로 살아남아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아이였던 태스커 마스터를 죽이기고 결심한 시점에서 블랙 위도우는 이미 세뇌에서 벗어났고 이에 따라 태스커 마스커를 죽이기로 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랙 위도우는 세뇌에 의해 타인을 해쳤던 다른 위도우들과 달리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다수의 위도우를 비참하게 했던 드레이코프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책임을 지게된 것처럼요.
하지만 영화는 태스커 마스터가 블랙 위도우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소녀를 죽이기로한 블랙 위도우의 선택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표현될 뿐 끔찍한 폭발의 피해자인 태스커 마스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도 가해자인 블랙 위도우를 응징하는 상황은 여러 이유로 인해 지연됩니다. 그러다가 태스커 마스커는 애꿎은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을 공격하고 감옥에 갇혀서 블랙 위도우 가족의 구원을 기다려야만 하는 신세가 놓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태스커 마스커가 세뇌가 풀린 상태에서 블랙 위도우와 나누는 대화를 보면 자신을 죽이려 했고 끔찍한 모습으로 만든 블랙 위도우에 대한 증오 대신 세뇌에서 풀어준 것을 안도하는 모습을 비춘 것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에게 끔찍한 고통을 준 가해자를 응징하기는커녕 그 가해자로 인해 구원받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스커 마스터를 세뇌에서 해방시킨 것으로 블랙 위도우의 선택에 따른 책임은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요?드래이코프 장군이라는 거대한 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악행은 피해자에 대한 선행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다른 주제였던 것인가요?
<출처 : Black Widow (2021) (imdb.com)>
한 작품에서 두 인물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가해를 가한 사람의 책임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만약 영화가 '선택할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 했다면 태스커 마스터에 대한 서사를 빼고 단순히 액션 장면에 활용할만한 악역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어차피 최종 책임자는 드레이코프 장군이었으니까요. 그럼 가해자인 블랙 위도우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괴로움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가해자가 책임질 수 있다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책임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악역인 드래이코프 장군은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것으로, 자녀들을 위도우로 만들었던 아버지 역할의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은 등장하는 내내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비참해질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규칙은 '어떤 상황'에 따른 예외보다는 '어떤 사람'에 따른 예외가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나는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도, 당신도 그래서는 안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나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그래주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