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차도 자기 자신이 아닐 수는 없다

랑종(2021)

by 나이트 아울

<해당 리뷰는 곡성과 랑종의 내용에 대해 아주 많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랑종'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으로 참여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처럼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속칭 떡밥으로 뿌려졌다가 회수되지 않은 이야기이고 또 다른 부분은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영화의 마지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곡성을 감상했을 때처럼 많은 생각이 시작되었는데, 그중 가장 머릿속을 맴들았던 의문은 이 질문이었습니다.

선한 신인 바얀 신은 왜 악령들을 물리치지 못했을까?




한 명의 영화 애호가로서 저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연관을 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 곡성에서 악이 세상을 휩쓰는 가운데 침묵하는 것 같은 선의 모습에서 절망하고 선의 존재를 불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파괴적인 에너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악에 비해 한없이 열악하고 무기력한 것은 시나리오를 쓴 나홍진 감독이 그런 모습을 선이라는 존재의 한계라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의 곡성과 다른 부분에서 다른 답을 도출해내고 싶었습니다.


곡성에서는 명백하게 악처럼 묘사되는 외지인(일본인, 쿠니무라 준)과 무당 일광(황정민)이 있기에 그들과 대적하는 무명(천우희)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선한 편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 속에서 주인공 중구(곽도원)의 눈에 무명과 일광은 어느 쪽이 선인지 명확하지 않게 인식되는데, 이는 무명이 악으로 묘사되는 존재와 대립하며 싸우는 모습을 중구는 한 번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중구의 딸인 효진(김환희)을 괴롭히고 사람들을 해치는 악의 존재는 언제나 명백히 드러난 데 비해 그것을 대적하는 선의 존재는 항상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외지인과 일광에게만 인식됩니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에 중구는 무명이 어느 쪽에 서 있는 존재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녀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랑종에 등장하는 바얀 신의 경우는 누구도 그 존재가 선한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신을 섬기는 ’님‘은 오랜 세월 동안 신의 힘을 빌어 사람들을 도와왔고요. 그와 동시에 이 작품 속에서 역시 곡성에서처럼 악의 힘은 명확히 사람들에게 인식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곡성에서 다루지 않았던 악의 근원까지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작품 속에서 악령에 빙의되는 ’님‘의 조카 ’밍‘(싸와니 우툼마)에게는 무수히 많은 악령이 빙의되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 무수한 악령 중 밍의 외할아버지의 보험금을 노린 방화 때문에 살해당한 사람들의 악령과 개의 악령은 악령이 된 이유가 명확히 이야기됩니다. 저는 작품 속에서 유독 이 두 악령만 탄생하게 된 이유가 언급되고, 심지어 작품의 마지막에 시아버지가 했던 악행의 방식(방화)으로 개의 악령이 밍에게 빙의되는 원인을 제공한 밍의 어머니 ’노이‘가 처단되는 모습에서 위에서 가졌던 의문의 해답을 발견했는데 해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신 자신도
자신이 만들어둔 법칙을 위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하의 글에서는 두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만약 실제로 바얀 신이 있고 그 신은 사람들의 믿음처럼 선하면서 전지전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는 암에 걸리면 병원에 가라고는 대사나 무속 신앙의 존재를 비아냥거리는 대사가 있다는 점에서 바얀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현재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틀을 벗어난 주술의 영역에 속하는 힘이 실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힘의 한계를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따라서 주술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이런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되는 존재, 즉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계를 측정할 수 없고 단지 믿음의 영역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전지전능하지만 인간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해결하도록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둘째, 세상의 모든 이치와 섭리는 바얀 신이 선을 구현하기 위해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빅뱅 이론에 따라 탄생했고 세상의 모든 일은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방향성만으로 결정되는데 이런 와중에 신은 세상 밖에서 인간을 해치거나 돕는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처럼 천지 만물과 세상의 법칙을 창조했고 여호와는 선한 신인데 그와 동시에 악한 존재가 있기에 이 세상에 악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니까요.



랑종에서는 신은 나무나 곤충과 같은 모든 것에 깃들었다고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대사에 따르면 바얀 신 또한 자신의 힘이 깃드는 존재인 ’님‘을 통해 선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선이 행해지도록 인간을 돕는 것이 신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얀 신은 이 세상의 이치, 즉 작동 원리나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이치가 구현되는 이 세상에는 크게 나눴을 때 쉬운 일과 어려운 일이 존재합니다. 그런 일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쉬운 일은 상대적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쉬우므로 쉽다고 말할 수 있고, 어려운 일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어렵다고 평가받습니다. 가령 헬스클럽에 6개월간 등록하고 한 달에 한 번도 가지 않는 사람은 쉬운 일이기에 우리 주변에 빈번히 볼 수 있고, 주 6회 이상 방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에 그런 목표를 실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인스타그램 밖에서만).


즉 쉬운 일은 그런 선택을 하기 쉽다는 속성 때문에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노력, 재능, 운, 지혜, 인내 등과 같은 희귀한 속성들이 중첩적으로 있어야만 가능한데, 반면 우리의 일상에서는 나태, 불운, 어리석음. 성급함과 같은 쉬운 속성들을 더 빈번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한 개인의 삶에서도 어려운 일보다 쉬운 일이 더 자주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럼 규칙을 지키는 일과 어기는 일 중에는 어떤 일이 더 쉬울까요? 아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규칙을 지키는 일보다는 어기는 일이 더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규칙을 어기면 지금 당장 명확하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규칙을 어겨도 만약 들키지 않으면 이익은 얻고 규칙을 어김으로써 부과되는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규칙을 그것을 위배했을 때 강력한 처벌과 제재를 예고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계를 갖춤으로써 쉬운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이익과 손해의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에서 작은 규칙이라도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규칙을 모두 지키는 것보다 하나라도 어기는 일이 쉬운 일이라는 것은 확연해 보입니다.




공장에 불을 지른 노이의 시아버지와 개고기를 판 노이의 악행은 전혀 다른 행동이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규칙을 위배하는 일, 다시 말해 쉬운 일을 선택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사업이 망한 책임을 지는 대신 대신 자신이 방화를 저질러 부정하게 보험금을 받으려 했고, 밍의 어머니는 개고기를 금지한다는 법을 어기는 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즉. 두 사람 모두 쉬운 방법을 선택했고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실제로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일, 다시 말하자면 빈번한 일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쉬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치를 신의 능력으로 어긋나게 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쉬운 일은 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치에 따라 많이 발생하는데, 그런 이치를 만들어낸 존재 또한 신입니다. 쉬운 일을 더 빈번하게 일어나도록 이치를 정해놓고 그것을 일어나는 것이 어렵게 혹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선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도록 힘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든 자신의 선행 행위와 모순됩니다. 또한 전지전능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오류를 가질 수 없는데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일어나도록 개입하는 일은 최초에 자신이 쉬운 일은 더 자주 발생하도록 만든 최초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가령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도록 법칙을 만든 신이 어느 날 자신의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이 향하도록 법칙을 수정한다면, 이는 최초에 정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떨어지도록 한 자신의 결정에 수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동시에 이전의 선택이 완전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인정한다면 처음에 전제로 삼았던 '신은 전지전능하다'라는 명제에 어긋나기에 신은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처음의 만든 이치를 바꾸는 선택은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될테니까요.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악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고 쉬운 일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도록 그 자신이 정했기 때문입니다. 신은 선하고 전지전능하지만, 존재의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조차 본인이 만든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더 쉬운 일, 다시 말하자면 규칙을 어기는 일, 혹은 악을 행하는 일이 더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신으로써도 어쩔 수 없는 일에 속합니다. 이런 신의 속성 때문에 신이 '전능'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전능한 존재라도 자신의 존재에서 벗어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유명한 역설인 '전능한 신은 자기 자신도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이러한 신의 한계 때문에 작품 중반부에서 바얀 신은 싸워보기도 전에 석상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합니다. 아니 그 한참 전인 영화의 초반부에서 밍의 꿈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목이 잘려 나갔다는 이야기에서 바얀 신은 자신이 만든 법칙에 따라 악에게 참패했음을 영화는 숨기지 않습니다.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랑종 '님'이 퇴마 의식을 해보기도 전에 쓰러져 버린 것도 이미 신이 정해놓은 이치를 거스를 수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패배를 인정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지나가고, '님'은 자신이 바얀 신을 느낀 적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언뜻 듣기에 그 고백은 신이 자신과 함께하지 않음에도 그동안 사람들을 속였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제 눈에는 선한 신과 함께했음에도 그 신이 만들어 놓은 악이 더 많이 발생하는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는 한계에 대한 체념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저에게 랑종은 공포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무기력함과 신의 한계에 관해 이야기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 심지어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악의 존재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한계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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