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유독 안 풀린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 밥은 굶지 않고 비는 맞지 않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순간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선 안쪽은 편안하고 예측 가능한 일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 선을 조금만 넘어가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 차마 선을 넘지는 못하고 그저 선 밖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2006년작 유레루를 뒤늦게 봤습니다. 지난 10년간 설 연휴 때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2022년 설 연휴 때 유레루를 본 것을 꼽을 만큼 훌륭한 영화였네요. 특히 이 작품에서는 주조연 가리지 않고 모두 연기가 좋은데, 특히나 미노루 역할을 맡은 카카와 테루유키는 소심하고 기운이 약한 캐릭터를 연기함에도 강렬함이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유레루는 이야기 측면에서 봐도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깊이 와닿은 부분은 '달라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영화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타케루(오다리기 조)가 고향에 남아있던 형 미노루(카카와 테루유키)와 친구인 치에코(마키 요코)와 겪는 여러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작품 속에서 타케루는 고향이 싫어서 오래전에 떠났고 미노루와 치에코는 그대로 남는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언뜻 보기엔 고향에 남아있는 미노루와 치에코의 후회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고 용기를 내서 떠난 타케루를 부러워하는 것 같은 장면들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작품을 다 보고 나면 '왜 그동안 고향을 찾지 않았던 타케루가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타케루는 또다시 변화를 원했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영화는 타케루와 치에코가 계곡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치에코가 도쿄라는 도시에 대해 가지는 동경을 드러내지만 정작 타케루는 도쿄에서의 삶을 시큰둥하게 이야기합니다. 언뜻 보면 치에코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둘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케루 역시 도쿄에서의 삶에서 부족한 부분을 느끼고 있었기에 선뜻 좋은 곳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겠죠. 아버지나 주변과의 갈등은 고려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타케루의 평소 태도를 봐도 도쿄에 대한 그의 대답은 꾸며낸 말이라고 보기 어려워 보입니다.
타케루는 만족스럽지 않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거기서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왔습니다. 그런 타케루를 보자 차마 선 밖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노루와 치에코는 타케루를 부러워하면서 새삼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뒤늦게라도 달라져보려고 노력하지만 운명은 잠깐 흔들린 그들을 선 밖이 아니라 선 아래로 떨어트려버립니다. 그리고 변화를 원한 타케루의 삶 역시 극적으로 달라집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타케루는 자신이 변화의 순간을 의식하고 선택한 것이지만 다른 두 사람은 흔들림에 균형을 잃고 추락한 것일 뿐이겠죠.
물론 작품을 다 보고 나면 변해야 한다고 느낀 순간에 용기를 낸 타케루의 삶이 추락한 미노루와 치에코의 삶보다 훨씬 나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이유가 타케루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좋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 타케루는 자신이 만든 변화 때문에 그 변화 이전보다 더 쪼들리고 비참해 보이는 상황에 놓이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달라지는 삶을 살기로 한 타케루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제 경험상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대로가 좋다는 그 순간조차 상당 부분 자기 자신을 속여야만 가능한 거짓된 환상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런 환상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고 환상이 깨지는 순간에 남는 것은 비참함과 뒤늦은 후회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선 안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이 환상이라면 선 밖에서 동경하던 관계는 부족한 관찰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실제 선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가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선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데 유레루를 보는 동안 저는 아주 오랜 시간 선 안에서 맴돌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달라져야 할 때는 달라져야만 합니다. 그 변화가 내 커리어를 해치고, 가족에게 말 못 할 고난을 안기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선택한 자발적 변화는 환상이 깨질 때처럼 비참함과 후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걷는 변화의 길에서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엇갈렸지만 다시 만나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어떤 형제의 관계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