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킨버그 감독의 2019년 작 엑스맨 : 다크 피닉스는 통칭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는 열두 번째 작품입니다. 모든 시리즈 영화가 그렇듯 열두 편의 작품 중에서는 정말 환상적인 영화도 있었고, 한숨과 탄식 말고는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뱉을 꺼리가 없던 작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한숨과 탄식의 왕좌를 굳건히 차지하던 게빈 후드 감독의 2009년 작 '엑스맨 탄생 : 울버린'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지존의 자리에 등극할 만큼 못난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화는 제한된 상영시간 동안 '갈등이 있다'라는 한마디를 풀어가 나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강렬한 액션으로만 채워진 단순한 액션 영화조차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장면이 등장하기 위한 조건으로 최소한의 갈등이 존재야 하니까요. 가령 토니 자가 주연한 옹박 -두 번째 미션은 주인공이 잃어버린 코끼리를 찾기 위해 악당들을 때려눕히며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대사도 "내 코끼리 내놔"가 전부인데, 그럼에도 그 무수한 액션은 오직 코끼리를 찾는다는 목적에 따라 펼쳐집니다.
다크 피닉스에서 중심을 이루는 갈등은 '진 그레이(소피 터너)의 지나치게 강한 능력'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해서 부모님을 죽게 한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더 강해진 자신의 능력을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문제는 그 고뇌를 해결하는 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작품 속에서 악역인 릴라란드(제시카 차스테인)는 진 그레이의 능력을 흡수해서 더 강해지려 하는데, 중반부에서 진 그레이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릴라란드에게 넘겨주려 하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힘만으로 능력이 빼앗기는 것을 막아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릴라란드는 물론 그녀의 일당들을 막아내면서 엑스맨들이 펼친 모든 액션과 희생은 갈등 해소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 속에 등장한 모든 엑스맨의 능력을 합쳐도 진 그레이 한 명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녀는 언제든 악당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었으니까요. 필요한 것은 오직 굳건한 다짐과 2분 남짓한 프로페서 엑스(제임스 매커보이)와의 대화뿐이었는데 2시간짜리 영화의 중심 갈등이 '마음먹기 달렸다'같은 불교식 해법 한마디로 해결된다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엑스맨 시리즈에서 매그니토(마이클 파스벤더)와 대립하며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프로페서 엑스(제임스 매커보이)는 작품 초반부에 그의 초능력이 진 그레이에 미치지 못하게 된 시점부터 급격히 역할이 축소됩니다. 세리브로를 이용해서 진 그레이를 찾지도 못하고 능력을 이용해서 적을 제압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가누는 게 고작이니까요.
게다가 진 그레이를 포함한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진 그레이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의 상처를 감춘 프로페서 엑스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제 눈에는 처음 만나는 시점에서 능력을 통제해 못한 결과 어머니를 죽게 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이면 더욱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비판받을 일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연한 사건으로 능력이 강해지기 전에도 당할 자가 없었던 진 그레이는 작품 속에서 성년이 될 때까지 큰 사고 없이 지내왔었고,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뮤턴트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칠 만큼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프로페서 엑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속편한 도덕적 비판만 남발합니다.
프로페서 엑스가 진 그레이의 '마음 고쳐먹기'에 매진하는 동안 매그니토는 진 그레이에게 살해당한 레이븐(제니퍼 로렌스)의 복수를 다짐하고 그녀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이전 시리즈에서 매그니토와 레이븐은 무척이나 각별한 사이였고 매그니토 또한 막강한 뮤턴트였기에 영화 속에서 매그니토가 복수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강렬하게 다뤄질 줄 알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 한 번의 실패와 맥락 없는 용서로 막을 내립니다. 심지어 진 그레이는 자신이 레이븐을 포함해서 자신이 해친 사람들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하지 않았음에도 말이죠. 사실 매그니토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피해를 본 인물인데,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능력과 집념의 소유자가 능력 부족에 좌절해서 복수를 포기한 것으로 끝을 맺게 되었으니까요.
2016 연작 엑스맨 : 아포칼립스에서 엑스맨 모두와 매그니토가 동시에 덤벼도 감당할 수 없었던 최강의 뮤턴트 아포칼립스는 진 그레이의 힘에 눌려 사라집니다. 이미 전작에서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던 진 그레이가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그 후의 이야기를 다룬 이번 작품에서 다른 뮤턴트들이 할 일이라고는 누워서 팝콘 먹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데이즈 오브 퓨처 페스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선사했던 퀵실버(에번 피터스) 조차 초반에 진 그레이에게 부상을 입고 퇴장한 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전까지 등장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강렬한 액션이 펼쳐졌던 영화의 후반부조차 모든 엑스맨들의 분투가 결과적으로 진 그레이의 손짓 하나면 정리될 일밖에 안된다는 점에서 안쓰러움을 넘어 배우들이 왜 출연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연 및 조연들 상당수가 다른 작품에서는 단독 주연을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는데, 출연료 때문에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 정도가 할 정도의 역할만 하기 위해 기꺼이 참여했다고 믿기지는 않았으니까요.
관객의 한 명으로써 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가 더 커진 이유로 꼽는 것 중에 하나가 CG 기술의 발달입니다. 이제는 돈과 시간만 들이면 천지가 개벽하고 우주가 뒤집히는 장면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가장 최신작임에도 몇 년 전 제작된 데이즈 오브 퓨쳐 페스트와 아포칼립스와 비견할만한 박력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서 스톰은 날씨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작품 속에서는 손에서 번개를 쏘거나 상대방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 전부이고,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매그니토 역시 금속 파편을 이용해서 적을 찌르거나 튕겨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전 지구를 뒤흔들고도 남을 두 명의 뮤턴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인지 힘이 강한 뮤턴트나 텔레포트 능력자가 보여준 장면들도 역시 근접 전투의 연속이었고요. 전작 아포칼립스에서 매그니토는 전 지구를 붕괴시키려고 했고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야구 경기장을 들어 올리는 능력자였는데 왜 이번 작품에서는 주먹질과 투척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요.
공식적으로 19년간 이어져온 엑스맨 유니버스는 이번 작품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프로페서 엑스와 매그니토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바뀌기도 했고, 휴 잭맨이 연기한 로건은 장엄한 장례식을 통해 사라졌지만 저에게 브라이언 싱어가 시작한 이 시리즈는 마블 유니버스 이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와 인상적인 장면으로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비록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쇠퇴한 액션과 얄팍한 캐릭터, 엑스맨 대신 엑스 우먼이라는 변화였다는 점에서 화룡점정이 아니라 용두사미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