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2016)
영화와 관련된 여러 글들을 보면 911 테러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그 전의 단순하고 명확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인물이나 시대를 좀 더 복잡하고 다면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항상 명확한 악인과 대적하던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 슈퍼맨 시리즈 조차 이제는 자신과 관련된 사건의 파장을 생각해야 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911 테러와 겹쳐 보이게 그린다는 점에서 911이 미국 사회에 끼진 영향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미국의 911 테러처럼 영화계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여러 사건들이 떠오르겠지만 비교적 최근에 발생했고,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사건 모두 사회적 파장이 워낙 크기도 했고, 실제로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먼저 개봉했던 부산행은 이 같은 두 사건의 그림자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그 소재들을 장르영화와 잘 결합시켜내면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산행보다는 조금 늦게 개봉했지만, 김성훈 감독의 2016년 작 터널 역시 앞에서 언급한 사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영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만한 완성도를 지녔다는 점입니다. 많은 작품들이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 자체에 매몰되어 영화적인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던 전례에 비하면 이런 성취는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의 중심에는 하정우라는 걸출한 배우의 연기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가 연기한 이정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재난을 겪어내면서 여러 감정들을 드러내는데, 그 감정들이 정말 깨알 같은 디테일로 잘 표현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단순히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 이상을 넘어 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고통 그리고 존경의 감정을 느끼게 했으니까요. 정수의 부인인 세현을 연기한 배두나 씨도 전형적인 모습처럼 보이는 부분은 있었지만 가족이 처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무기력함을 인상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이 두 배우를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다른 곁가지는 모두 쳐내고, 전달하려는 이야기에만 집중하여 질주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의 선택은 화룡점정이었고요.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공권력이 한 개인에게 닥친 재난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고 있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신도 부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암울한 세상에서 조차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고, 그 선택의 길에는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절대 진리인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서로가 함께하는 '연대'가 놓여있습니다. 저는 아직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이 작품에서 이정수라는 인물을 통해 한 사람의 양심에서 비롯되는 희망의 그림자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좋음'의 영역인 각자도생을 뛰어넘는 '옳음'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