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스나이퍼(2014)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하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만든 1988년 작 '반딧불의 묘'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평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태평양 전쟁 중의 일본을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품을 보고 나면 나면 감독이 의도한 바는 그 당시 일본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판단으로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감상과 별도로 타카하시 이사오 감독이 일본인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과 끝나지 않은 위안부 문제, 그리고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반딧불의 묘가 조금은 미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14년 작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개봉 당시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고 감독의 최고 흥행작이 됨으로써 상업적인 면에서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반딧불의 묘처럼 작품의 해석과 의도를 두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배경에는 이 작품이 석연치 않은 시작과 어정쩡한 종전선언으로 마무리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상황을 명확한 선과 악으로 그려냈다는데 있었는데, 우리가 반딧불의 묘를 바라보는 것처럼 미국인이 열광하는 어떤 시선이 미국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왔던 것이겠죠.
언뜻 생각하면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말은 무척이나 좋게 들립니다. 어떤 사건을 평가할 때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여러 입장을 충분히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균형 잡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수평 상태에서 기울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 균형이 어느 방향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전달하는 '이야기의 양'을 비교했을 때는 분량상으로 균형을 맞출 수 있지만, 실제로 균형을 잡는 지점이 어디인지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은 한쪽의 입장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양쪽 모두를 불러놓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편집 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분명히 한쪽 방향으로 더 강하게 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격수로 참천한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레들리 쿠퍼)이 전쟁터에서 마주하는 적은 아이에게 조차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악당이거나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전직 사격 선수, 몰래 무기를 숨겨 반군에게 협력하는 자와 같이 미국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용인하기 어려운 행위를 하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이 해치는 적은 부득이하게 죽이는 어린아이조차 그 '부득이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데, 제게는 이런 영화의 태도가 귀국 후에 그가 겪은 아픔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착한 양을 지키고자 늑대에 맞서는 양치기 개'가 되고자 했던 한 사나이가 어려운 고난들을 이겨내고 무고한 희생 없이 임무를 다했다는 이야기에서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고요.
결국 모든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거기서부터 전혀 다른 의미와 해석이 나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시각 이전에 필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아는 것이고, 그 후에야 상대방과 이야기의 해석과 관련해서 충돌이 발생하는 방향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서로가 향하는 곳을 알아가기 전에 상대방이 서 있는 위치를 인정할 수 있는 약간의 너그러움도 반드시 필요하긴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