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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트 아울 Feb 11. 2024

당신들의 낙원

나이트 아울

어느 날 세상에 썩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차오르던 썩은 물이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 썩은 물은 영화에 나오는 에일리언의 피처럼 닿든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악취 외에는 존재한 적이 없던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런 물이 전 지구상에 동시 다발적으로 차올랐으니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조차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없는 시력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종말의 시작은 강과 바다에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막을 올렸다. 그 말인 즉 슨 곧 마실 물이 부족해질 일만이 남았다는 뜻이다. 미드 CSI에 등장했던 누군가는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를 버틸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제 인류에게는 그 드라마 대사처럼 건조하게 읇조릴 여유 따윈 없어져 버렸다.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니까. 썩은 물은 점점 차오르며 도시를 침식해 나가더니 이윽고 아주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까지 집어삼켰다.


일반인보다는 다소 침착해 보이는 과학자들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썩은 물은 최소 지상에서 8848m 이상으로 차오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순간 기자 회견장에 있던 누군가 “젠장. 네팔로 가는 비행기 표 되팔이 하려고 했는데 망했네”라고 말했던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시한 농담이라도 없었다면 인류는 에베레스트로 도망가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저 뉴스 앞에 절망해서 집단 자살이라도 했을 테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도 않게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힘쓰는 동시에 누군가를 탓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과잉소비로 인한 대재앙이라느니,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라니, 미세 플라스틱에 녹아있던 미량의 독소가 임계점을 넘었다느니 등등 어떤 부분은 맞을지라도 결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많은 말들을 문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앞둔 절체정멸의 순간에서 조차 모든 사람이 떠들었다. 단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이런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시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썩은 물이 차오르기 전이나 후나 세상 모든 나쁜 일은 남들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입이 달렸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불쌍한 생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영양가라고는 전혀 아무 말들을 쏟아내는 가운데도, 말은 3주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아주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즉시 식수와 식량을 확보하고 썩은 물이 녹일 수 없는 정도의 구조물을 건축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지를 계산해 냈다.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브린이 달에 착륙한 일이 있던 해가 1969년인데 AI의 시대에 저정도 계산이 오래 걸릴 리 없었을 것이다. 단 하나의 가장 어려운 변수,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냐’라는 변수만 명확히 해낸다면.    

 

현명한 소수의 인류는 가장 어려운 변수를 가장 손쉽게 계산함으로써 자신들을 위한 안전지대를 만들어 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에게 어려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외에는 누구도 살릴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 말하자면 그들이 친구나 연인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소홀히 생각했다고 폄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세상을 살아 본 사람(이들을 어른이라고 하겠다), 어른이라면 우정이나 사랑 같은 말의 유통기한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뿐’이라는 사실을 남의 피눈물이나 자신의 피눈물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의 선택은 비정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썩은 물을 막는 건축물을 올림픽 체육관 정도의 시설로 완공했다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과 인터넷 바깥세상의 삶이 보여주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다지 잘 견뎌내지 못한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타인의 못난 점과 이질적인 점을 참고 지낼만한 여유도 의지도 없는 생물이 인간이라는 슬프고 약한 존재인 것이다. 각자가 서로의 집에 박혀 살 때도 세상은 썩은 물 바로 위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는데 그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 출구에 못질을 하고 같이 행복하게 살라고 하면 텔레토비 동산 같은 그림이 그려질 리 없다. 적어도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현실적인 여건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더해져 썩은 물을 막을 수 있는 시설(이제부터는 ‘벙커’라고 부르겠다)은 한 벙커에 간신히 몇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수준으로 세계 곳곳에, 세상이 멸망하는 시점에 자본주의적으로 아주 운이 좋았던 몇 명의 부자와 그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함께 한 사람들만 들어간 가운데 조용하고 신속하게 완성되었다. 그 소수의 사람들에 끼지 못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사악하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겠지만 그 사람들조차 적어도 두 가지 질문에는 솔직하게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이라도 그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겠어요? 정말로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당신이 그 비슷한 행동이라도 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렇게 세상은 멸망했다.


세상이 멸망한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다룬 작품은 무수히 많지만 그 대부분의 영화는 지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매드 맥스 같은 걸작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까지 물에 잠겨 녹아 없어진 세상에 나올 수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의 전성기를 집어삼켰다고 평가받는(하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1995년 개봉작 ‘워터월드’겠지만 그 영화에서조차 바닷물은 맑고 깨끗했다. 그런 고로 인류는 적어도 영화를 통해 썩은 물이 차오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경험을 하는 데는 실패한 상태로 벙커에 들어가야만 했다.  물론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런 간접경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미래를 바꾸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미래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알 지 못하는 것처럼.

   

벙커에서의 삶은 무료하고 두려웠다. 무료함은 벙커에 들어오면서 허겁지겁 챙겨 온 속칭 ‘즐길 거리’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서는 즐길 수 없다는 사실과 항상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타인의 고통과 어리석음’이라는 정보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이 달리는 일에 무료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것처럼 두려움은 모두를 사로잡으면서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제 벙커 밖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녹아서 사라졌고 남아있는 물과 식량은 에너지보존법칙과 질량 보존법칙에 충실하게 모두 사람들의 입을 들어가 더 이상 섭취할 수 없는 형태로 반환되었다. 문제는 그 반환된 ‘무언가’를 다시 입에 넣을 수는 없었다는 것일 뿐. 아마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반쪽짜리창조주라는 사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줄 구세주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무척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썩은 물 바깥에는 인간들이 원하는 형태와는 조금 다르지만 천천히 죽어가는 인류를 가엾게 여긴 구세주가 있었던 모양인지, 구세주는 인류의 무료함과 두려움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해소해 주는 방식으로 구원을 주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썩은 물은 처음 그들이 벙커를 지을 때 보다 더 독해졌고 벙커의 벽에는 아주 조금씩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루를 허비하는데 아무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벽에 있는 균열이 이윽고 커져서 안에 있는 사람들의 뼈와 살,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미래를 상상하는 데는 아무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최후의 희망, '과학'이라는 카드가 있었다. 진시황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비과학’이라는 것에 휩싸여 환갑잔치도 치르지 못하고 잠들었지만 21세기 인류는 춘추전국시대 직후의 황제와는 차원이 다른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벙커 안에 있는 단 한 사람만 그런 무기를 다룰 수 있지만 여튼 극 소수의 인류에게 희망은 있었다.  앞서 방송에 나가 전 인류 앞에 나섰던 과학자처럼 벙커 안에서 몇 명의 비과학자에게 나선 과학자 역시 실망스러운 발언으로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현재 벙커 안에 있는 재료로는 벙커의 균열을 막을 수 없다고, 이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썩은 물이 벙커 내부로 차오를 것이라고, 과학자는 그저 담당하게 지금의 현실과 미래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과학자에게 울며 매달리는 사람, 그저 웃으면서 남은 식량을 먹어치우는 사람들을 그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과학자는 이윽고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여러분을 벙커 안에 있는 것처럼 살아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게'는'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과학자의 어금니 옆 덧니가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과학자의 입에 모든 시선과 관심을 집중했다. 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금 가진 재료로 벙커의 벽을 보수할 수 없는 이유는 재료가 부족해서인데, 그 재료를 가지고 벙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침낭처럼 한 명씩 간신히 감쌀 수 있는 얇은 보호막을 만드는 것과 그 안에서 인간의 에너지 소비를 사실상 제로로 만든 상태로 아주 오랫동안 버티게 하는 약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바깥에 있던, 이제는 썩은 물의 일부로만 존재하는 그 우수한 모든 과학자들이 모여서 마지막으로 ‘토의’라는 것을 할 수 있던 순간, 과학자들은 이 썩은 물이 완전히 사라지는데 약 20,000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어디까지 예측에 불과했지만 그 예측을 반박할만한 다른 자료도, 지성도 없는 가운데 그 예측의 참과 거짓을 다툴 수는 없겠지만, 벙커 안에 남아있는 최후의 과학자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각각 보호막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알약을 먹고 혼자서 20,000년을 견뎌낸다면, 그때는 보호막 밖으로 나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과학적 설명만으로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경우란 없다. 일단 가장 처음으로 입을 연 ‘비과학자’는 보호막에 들어가면서 먹는 약을 먹으면 잠드는 것처럼 의식이 없어지는지 여부를 물어봤다. 과학자는 답했다. 시뮬레이션 테스트 결과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보호막 안에 오랫동안 있으면 사망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여 의식은 유지한 상태로 생체 에너지만 최소하면서 버티는 것이 최선이라고. 이어서 다른 ‘비과학자’가  ”보호막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겠냐"고 묻자 과학자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2만 년이라는 시간을 도망갈 수도 없는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의식이 있는 상태로 있는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과학자와 비과학자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질문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이어졌다.

    

”아무리 신체활동이 없어도 2만 년을 의식이 명료한 상태로 있으면 정신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     


이 질문이야 말로 과학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였다. 생존은 가능하다. 하지만 내 주변의 환경은 보호막을 둘러싼 불과 1cm도 안 되는 풍경 속에서 2만 년간, 문자로 표현하면 거의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다. 스마트폰도, 넷플릭스도, 영화도, 책도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그 작은 공간 속에서 2만 년을 버틴다는 것은 49일 동안 한 자리에 앉아 도를 깨우쳤다는 부처님에게도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모든 사람들 구원하지는 못해도 과학은 가능했던 모양이다. 과학자는 부처님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원한 고독함과 외로움을 아주 약간의 화학물질만으로 해결했다. 바로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다.  

   

썩은 물이 곧 벽에 생긴 균열을 따라 벙커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현실을 명확히 인식할수록 고통은 커진다. 벽을 보수할 방법도, 탈출할 방법도 없다는 것을 사실이 더 명백해질수록 고통은 더욱 커지면서 이윽고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사람을 몰아세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명백함’이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해 버리면 어떨까?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뺀 사전을 가지고 길진 않지만 황제로써의 삶을 누렸는데 ‘의식의 명백함’ 하나를 포기한 대신 몽롱한 상태로 2만 년을 견디다 보면 언젠간 내 인생에 햇살이 드리울지 모른다는데, 왜 그 길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차피 세상이 이 모양이 되기 전에도 사람들 주변에 진정 ‘나의 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어차피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생존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돈을 버는 생활에 찌들어 인간관계는 ‘인맥’이라는 수익률 3.78%가 기대되는 투자상품이 되었고 배우자는 하루에 30분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서로를 방치하고 있었으며 자녀는 나에게 기쁨을 주던 네발 달린 존재에서 욕망하는 것이 많아진 두발 달린 존재로 변화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을 위해 상대가 가진 '무언가' 필요했을 뿐 진정으로 그 사람을 원하지는 않았다. 슬프게도 그게 어른이라는 길에서 깨달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통을 피하고자 언제나 적당한 관계,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 눈에서 벗어난 관계에 대해서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 왔던 것이 벙커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누려왔던 ‘보통의 삶’이었다. 그런 관계의 몽롱함 덕분에 얽매이는 것이 적었고, 얽매이는 것이 적었기 때문에 이제는 최후의 인류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니체가 말했던 ‘초인’ 아닐까,라는 오만함이 잠시 사람들을 스쳐갔지만 그 누구도 니체의 저서를 유튜브에서 요약해 주는 것 이상으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비극도 희극이 아니었다.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과학자와 비과학자들은 2만 년 동안의 고독에 빠져들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과학자는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들어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동료 과학자가 누구도 변명해 주기 어려운 바보 같은 짓을 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직원의 아는 형이라는 다른 과학자가 탄원서를 들고 다니며 사고를 쳤던 직원이 조금이라도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실제로 효과가 있을지도 불확실한데)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서명을 부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자신의 실수로 곤경에 처한 젊은 직원이 했던 일보다 훨씬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잘 나가던 그 직원의 바보짓은 비웃으며 즐길 거리, 그리고 남의 일인데 왜 당신은 그들처럼 살지 않고 굳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도 아닌 일로 고개를 숙이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인가. 어차피 남이고 친구라고 해 봤자 직장생활에서 만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인데. 사람들도 그걸 아니까, 이 사건 전까지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기꺼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다니는 당신을 문전박대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그런 현실에 눈을 돌린 상태로 왜 멍청하게 남을 돕고 살았으며 그때도 남을 도왔던 것일까. 결국 썩은 물이 밀려왔던 그날이 이후 당신과 당신이 도왔던 사람들, 당신이 도우려고 했던 사람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많은 시간을 누워서 넷플릭스나 보고 술이나 마셨으면 더 즐거웠을 텐데 그 사람은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썩은 물 같던 무관심함이 공기 중에 유해한 듯 무해하게 녹아있던 이 세상에서 어떤 풍경을 보았기에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윽고 그런 의문은 아무 의미도, 심지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과학자가 만든 약의 효력은 절대적이니까. 사람들은 신속하게 침낭처럼 생긴 보호막 안에 들어가 과학자가 준 약을 삼켰고 보호막을 완전하게 폐쇄하여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그들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졌다. 벙커의 벽이 무너져 썩은 물이 들어와도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며 2만 년 동안 가만히 있으면 썩은 물은 모두 사라지고 나는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1cm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보호막 안에 차올랐다. 그리고 2만 년 뒤에 그들 모두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생존하며 삶에 행복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인생은 혼자서 한번 사는 것이니 나만의 지상 낙원을 다시 이 세상에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은 절대적으로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약효가 퍼지는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이 온전할 때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머무른 상태에서 몽롱한 상태로만 바라보며 아무 말이나 했는데 이제는 그 영역이 아주 좁아졌고 아무 말이나 해도 들어줄 상대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래, 돌고 돌아 세상은 제자리고 향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각자 꿈꾸는 자신만의 낙원을 향해서.   


<이미지 출처 : Free Photo | Grayscale vertical shot of seawater (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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