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학원 (2009)
며칠 전 한 걸그룹의 멤버가 거식증 증세로 활동을 중단한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걸그룹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이 부른 노래 중 몇 곡은 무척이나 좋아했었기에 쾌유를 빌면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거식증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녀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요. 윤재연 감독의 2009년 작 요가학원은 공포영화라는 장르 본연의 재미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주제로 다룬 이야기도 명확히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아쉬운 작품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아름다움이 가진 의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부분을 남겼습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사람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내가 그 대상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타인(혹은 사회)이 그런 것을 가지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자기만족이라기보다는 사회가 특정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기 때문에 본인들도 그런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을 겪게 하고 비틀린 삶을 살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별개로 말이죠.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금기를 지키면서 행하는 수련과정 끝에 오직 한 명만이 얻을 수 있다는 '쿤달리니'를 위해 경쟁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이한 일을 겪어 고통받아 항의하는 유경(김혜나)에게 요가 마스터인 수련(차수연)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언제든 이곳을 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도 유경 씨를 잡지 않아요 "
언뜻 생각하면 고통의 근원이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당장 벗어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 밖을 나서기 전에는 화면 속에서, 문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입을 통해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회에서 얼마나 다른 대접을 받는지를 보고 있자면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때문에 그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고통은 '자발적' 경쟁이라는 이름하에 끊임없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승리한 소수의 사람만이 바람직한 표준처럼 다른 사람들의 '자발적' 숭배 대상으로 남게 됩니다.
두말한 나위 없이 아름다움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자원이고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삶의 반경을 무척이나 넓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아름다움의 정도는 사회적인 자유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갈망하는 쿤달리니가 오직 한명만 도달할 수 있다고 설정된 것처럼, 아름다움의 이상향은 언제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그 때문에 이 거대한 지옥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자유를 꿈꾸며 좌절하고 고통받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거기서 탈출할 자유와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자유, 어느 쪽이 선택하는 사람을 더 자유롭게 만들지는 결국 그 선택에 따르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둘중에 어느 길을 걷던지 삶에서 자유는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까지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