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타케시 감독(1996)
새해가 되기 전 날, 남자는 새해가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남들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새해가 와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상대하는 시간을 견뎌낸 보상을 받는 급여, 그리고 지금과 같은 잠깐의 평화뿐이라는 진실 혹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예측 때문에 일찍 누웠음에도 그를 현실 바깥으로 인도해 줄 꿈의 마차는 오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이 찾아온 적이 애초에 있긴 했을까. 남자는 어둡고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새삼 그동안의 삶을 돌아본다.
한때 남자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혜성같이 저 멀리서도 모두가 볼 수 있었던 그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귓가에는 나팔소리가 울렸고 그의 앞길은 누군가 장밋빛 카펫을 깔아놓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나중에 깨닫게 된다. 자신은 혜성이었으나 혜성처럼 잠깐 반짝였다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될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남자를 감싸고 있던 빛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후부터는 남자의 인생은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남자를 슬프게 하는 것은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빛이 사라졌음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현실이 무덤 바깥에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는 무미건조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진실, 그것이 해가 갈수록 남자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는 남자의 귀에 이제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새해를 앞두고 흥청망청 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나 집 밖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혹은 냉장고에서 들려오는 컴프레셔 소리도 아니었다. 그 소리는 바로 깊은 어둠 속에서 비춰 나오는 희미한 빛과 함께 나는 소리였다. 그 빛은 집중하지 않으면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저 깊은 어둠 속에 분명 빛은 있었다. 그 빛에 더욱 집중하자 희미했던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남자가 혜성 같던 시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럼에도 뭔가 애를 쓰고 노력하던 누군가 땀방울을 흘리며 자신의 길을 걸으려고 하다가 볼품없이 넘어져 끙끙대면서 낼 때 들려왔던 소리였다. 그리고 남자는 깨닫는다 저 소리가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아무도 모르던 시절에 냈던 고통과 탄식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남자는 빛을 향해 손을 뻗던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감췄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것처럼 흥청대면서 낙관이라는 변명에 빠져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자신이, 타인의 노력을 가벼이 여기면서 게으름을 정당화했던 스스로가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탄식할 차례였다.
"나는 그 소중한 순간들을 왜 헛되이 보내고야 나서 알게 된 것일까. 차라리 영영 몰랐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부끄러움의 무게에 짓눌려 남자가 눈을 돌렸음에도 희미한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빛은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멀어지지도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제야 남자는 다시 깨닫는다. 자신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자신을 한번 비웃어 주고 이번에는 자신이 끙끙대는 순간을 견뎌내며 다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사실을.
그리고 며칠 후, 남자는 아직 걷지는 못한다. 아직은 다리가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을 향해 기어가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고 있다. 남자는 믿어보기로 했다. 기어가다 보면 언젠가 다리에 힘도 들어오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어쩌면 자신의 운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아직 올 한 해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