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7 : 심연의 끝에서

by 나이트 아울

눈이 떠졌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이미 죽어있고 이 어둠 속에서 무한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 밖에 남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던 경적 소리. 희미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멀리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운전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울렸던 경적 소리였다. 지옥에서 갓 도착한 신입에게 자동차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고, 아마 천국도 아닐 것이다. 진실이 지금 나에게 속삭이고 있는 말은 여전히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내 인식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간신히 오른손을 올려보려고 하는데 뒤통수 부분에 무언가 찌릿하는 느낌이 스쳐 갔다.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만져보니 따뜻하고 끈적끈적하다는 사실까지는 알 수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정에는 아무런 조명도 없었지만, 이 어둠 속 전체에서 단 한 군데 빛이 나는 곳이 있었다. 또다시 죽음을 생각했고 이번에는 천국을 떠올렸다. 다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릎으로 기어서 천국을 향해 기어갔다. 기어가면서도 머릿속에는 구원이니 영원한 낙원이니 하는 어릴 때 교회에서 들었던 단어들이 스쳐 갔다.


하지만 그 빛에 도달한 순간, 나에게는 어떤 구원도 주어지지 않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빛 속에서 내가 왼손으로 집어 들 수 있었던 것은 차갑고 딱딱한 느낌의 손전등이었다. 역시 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은 나와는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손전등으로 오른손을 비춰보았다. 거기에는 검은색 외에 다른 색의 얼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내 뒤통수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무언가’는 나를 밀치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밀려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혀서 의식을 잃었다가 지금 깨어난 것이다. 내 머리 뒤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때에 비롯된 고통의 흔적이었다. 혹시나 출혈이 더 있을까 싶어 오른손으로 다시 상처 부위를 만져봤지만 다행히 출혈은 멈춘 상태였다.


손전등을 들어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폐공장의 흉측한 속살이 드러났다. 거대한 프레스 기계들은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굶주린 짐승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녹슨 체인들은 미세한 진동에도 기분 나쁜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다. 바닥에는 굳어버린 기름때와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어, 한 발을 뗄 때마다 서글픈 마찰음이 고요한 사방을 울렸다.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거대한 무덤 같았다.


나는 천천히 기어서 손전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 홀스터에 넣었다. 잠깐 숨을 돌리고 무릎에 힘을 주니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눈에 익숙해진 어둠을 헤치며 나는 다시 한번 죽음을 떠올렸다. 아까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진짜로 죽었다면, 내 인생에 가장 아쉬운 일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했던 아내의 모습이 제일 먼저 스쳐 갔다. 그녀를 사랑했던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그것만큼은 천국에서도 말할 수 있었다. 추운 겨울 퇴근길, 현관문을 열면 나를 반기던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부엌에서 풍기던 고소한 음식 냄새. 그 소박한 공기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내 인생은 그냥 숨만 쉰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우리가 나누던 대화가 의무적인 단어들의 나열로 변해갈 때, 나는 이 폐공장의 녹슨 기계들처럼 서서히 멈춰갔다.


성공도, 돈도, 다 그냥 부질없고 하찮게 여겨졌다. 내가 고매하고 우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것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그 돈을 불리고 지키느라 24시간이 부족하게 살다 병원에서 손도 못쓰고 저세상으로 가는 모습, 성공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불운’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는 모습. 나는 살면서 무수히 그런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아내와 헤어진 직후에는 내가 아내에게 더 잘했다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기대와 후회로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진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기대와 후회는 부질없다는 것을, 세상에는 내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행복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폐공장 깊숙한 곳에서 입구로 향할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거미줄은 마치 나를 붙잡으려는 올가미처럼 보였고, 벽면의 벗겨진 페인트 조각들은 문드러진 피부처럼 흉측했다. 이 버려진 공간의 정적은 내 가슴속의 공허함과 꼭 닮아 있었다.


입구에 가까워지니 빨간색과 파란색 조명이 깜박이고 있었다. 아마 차 안에서 자고 있는 고참이 현장에 도착하고 조명을 끄는 일조차 귀찮았기에 볼 수 있었던 순찰차의 조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게으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둠 속에서 탈출할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저 빛 너머에는 다시 지독하게 평범하고 무의미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곳을 나가고 내일이 오면 나에게는 오늘과 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내 곁에 없고 나는 가고 싶은 방향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는 삶을 하루하루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이어가던 삶이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 나를 이 좁은 모텔방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날 폐공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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