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 (2017)
2002년에 개봉한 레지던트 이블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작품의 속편이 2017년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게임 원작 영화는 망한다'는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경험칙에서 살짝 빗겨나가긴 했어도 레지던트 이블 1편은 결코 잘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슈퍼 마리오나 스트리트 파이터의 실사 영화와 비교하자면 레지던트 이블은 대부나 시민 케인에 버금가지만, 이 시리즈가 15년간 무려 여섯 편의 작품이 제작될 수 있던 이유는 다른 실패작들과의 상대 우위를 넘어선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또는 노력은 한) 작품이 폴 앤더슨 감독의 2017년작 '레지던트 이블 : 파이널 챕터'입니다.
시리즈를 이어온 미덕이자 이 작품의 장점은 오직 '보여주기'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앨리스(밀라 요보비치)는 시종일관 길을 걷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나서 1) 잠시 이야기하거나 2) 싸우거나 3) 죽이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데, 이런 단순함은 관객이 오로지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순간순간의 액션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액션밖에 볼 것이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영화는 다양한 장소를 배경으로 여러 상황에서의 액션을 보여주는데, 액션 장면들이 워낙 속도감 있게 지나가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전에 관객은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액션을 감상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정도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장점은 5편까지는 나름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액션 장면 자체의 허술함은 논외로 하더라도 눈만 뜨고 있어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은 의외로 적고, 실제로 1편부터 5편까지 꾸준히 흥행 상승세였다는 점에서 관객들도 역시 만족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이번 편에서는 너무나도 빠른 카메라 이동과 명암 조절의 실패 때문에 액션조차 집중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인간 이외의 존재와 마주 할 때는 너무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대략적인 윤곽도 파악할 시간도 주지 않을 정도고 빠른 화면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이처럼 액션의 연속만이 유일한 장점처럼 보이는 작품에서 액션까지 삐걱대는 순간, 각본, 캐릭터, 연출 모든 점에서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름조차 말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인물들이 오직 죽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고 악역은 전형적이고 허술한 데다가 반전이나 심지어 기본 설정 자체가 시리즈의 마지막을 맺기 위해 억지로 이야기를 쥐어 짜낸 것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모든 시리즈는 용두사미와 화룡점정의 사이에서 반드시 끝을 맺게 됩니다. 물론 배트맨이나 007 시리즈처럼 주연 배우가 교체되면서 명맥을 이어가는 작품도 있지만 15년을 밀라 요보비치라는 한 배우의 힘으로 끌고 온 이 시리즈는 결국 뱀 꼬리와 가까운 지점에 마지막을 장식해버렸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레지던트 이블은 며칠 전 신작 게임이 발매되었고 미드로도 제작된다니 앞으로도 계속 즐길 수 있겠지만, 이런 어려운 영화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다채로운 액션을 보여준 앨리스를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만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아쉬움과는 별개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네요.
P.S 한동안 밀라 요보비치와 영화를 찍는다고 뉴스면을 장식했던 이준기 씨는 영화에 출연했다기보다는 스쳐갔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의 분량밖에 나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