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고질라 (2016)
어릴 때 무척이나 즐겁게 보았던 후레쉬맨과 바이오맨, 울트라맨이 '특촬물'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에는 더 이상 그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나이가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좋아하는 분들은 있겠지만 저에게는 '맨'으로 끝나는 특촬물이 그 장르의 시작이자 끝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영상물을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지금도 굳이 찾아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래서인지 특촬물계에서는 전설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던 고질라가 정식으로 개봉한다는 소식에는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두 편의 고질라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과 특촬물이 그다지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장르가 아니라는 현실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2016년 작 '신 고질라'를 보고 나서 확실히 느낀 점은 이 작품이 단순히 기존에 특촬물의 향수를 가진 사람들만을 겨냥한 작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는 고질라를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 자체처럼 의인화하면서 전대미문의 재난이 닥쳤음에도 무수히 많은 회의와 논의 그리고 절차를 지독하게도 준수하고 이후의 책임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무엇을 할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건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던 정부와 원전 책임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난과 조롱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모습은 사고 당시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맨 위의 사진과 같이 방사능 빔을 난사하며 도시를 파괴하는 고질라와 그에 맞서 싸우는 군인과 영웅들의 모습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보셨다면 블랙 코미디의 연속인 초중반부의 어이없음에 지쳐서 도중에 극장 밖으로 나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장르 영화,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 한정된 장르일수록 그 장르에서 반복되는 일종의 공식 같은 장면이나 대사를 모르면 즐기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 고질라는 저처럼 일본에서 제작된 고질라는 한편도 보지 않은 사람조차 재난 앞에서 속절없는 모습만 보여주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마 일본 관객이었다면 더 직접적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고 당시의 책임자들을 대입시킬 수 있었겠지만, 일본인이 아닌 제 눈에도 신 고질라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원전 사고 당시의 재현 연기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의무방어전처럼 등장하는 연설 장면과 독백을 가장해서 관객에게 직접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은 최근 상업적인 일본 영화뿐만 한국 영화에서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볼 때마다 닭살이 돋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네요.
고질라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이 영화의 예고편만 봤을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블랙 코미디 장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본인에게는 무척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장르물의 틀로, 그것도 은유라기보다는 거의 직유로 비판해냈다는 점에서 신 고질라는 고질라 시리즈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저에게 조차 무척이나 신선하면서도 아픈 곳을 조금은 위로해주는 작품으로 기억될 듯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