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시간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찬가

어 퍼펙트 데이 (2015)

by 나이트 아울
d5aa82e6b415b7d27da62c44cdc9045cbbe68268.jpg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94007#1197062>


살다 보면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순간을 마주하는 때가 있습니다. 지난 역경의 시간들이 '무의미'라는 한 단어로 축약되는 것이 서글프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미 무의미하다고 결론이 난 현실은 변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도 있고요.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과정에서 나는 더 성장했다'는 말로 고통을 덜려고 시도하는데, 전쟁터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 결과에 배신당하는 상황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페레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의 2016년 작 '어 퍼펙트 데이'입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발칸반도는 20세기 후반 가장 참혹한 전쟁터라고 평가되는 유고 슬라비아 내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그곳에서 식수가 끊기는 상황을 막기 위해 활동하는 구호요원 맘브루(베니치오 델 토로), B(팀 로빈스) 그리고 소피(멜라니 티에리)는 중요한 장비가 파손되자 대체할 물품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는데 그 노력들은 번번이 미끄러지거나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좌절됩니다. 그럼에도 작품 속 인물들 중 누구도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던 원동력은 바로 유머와 시간의 힘이었습니다.





1a80ecffb0e270d73b277d61a045091abe4e073e.jpg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94007#1184047>


영화 속에서 유머의 힘과 시간의 힘은 모두 '현재' 연결되어 있는데 우선 유머는 등장인물들이 당장 식수가 끊길지도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의 시간 앞에 주저앉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일말의 여유를 제공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남은 선택지는 절망하며 비참함을 맛보는 일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머는 무척 유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짙은 씁쓸함을 동반하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원동력인 시간의 힘은 애초에 신의 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는 '미래'의 결과에 집중하는 대신, 현재에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만 집중하는데서 발휘됩니다. 전쟁터 같은 통제불가의 상황에서 결과에 배신당하는 일은 무수히 많을 텐데 그 순간마다 좌절감을 느낀다면 구호활동은커녕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무력감에 빠질 테니까요. 그래서 영화는 맘브루 대사인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만 집중해. 지금 이 순간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어. 계속 가는 거야. 그러면 결국 집에 가게 될 거야."라는 말을 통해 현재의 시간을 버티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중요한 순간에 놓인 사람들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격려의 말이지만 대부분의 노력은 실패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무수히 배신당한 노력들에 의해 점철된 곳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는 마음 이상으로 유머와 시간의 힘을 믿고 실패한 결과의 파도를 견뎌낼 수 있는 일말의 여유가 필요할 것입니다. 원하는 바는 모두 이루어지지 않고, 심지어 결말에 가서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러 감에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저 또 하나의 집중해야 할 '현재'로 받아들인 맘브루와 그의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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