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지금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한동안 서점과 TV를 점령한 짧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을 해라'
물론 말 자체는 딱히 새로운 것이 없는 말이었고 그 당시에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경제적 걱정 없이 하는 속 편한 충고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저 짧은 문장에 대한 열광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단 한순간도 가슴이 뛰는 일을 겪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 작 버닝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나 가슴이 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벤(스티븐 연)과 종수(유아인), 혜미(전종서)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공허함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겪는 파국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 사람 중 종수와 혜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 막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나왔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고, 혜미는 성형수술로 고친 외모에서 나오는 매력을 이용할 수 있는 일로 행사장 내레이터와 같은 일을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그들이 하고 싶다고 정한 일은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정해야할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그들 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꿈과 미래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무척이나 공허하면서 지루하거나 쓸쓸하게 그려지고 있고요.
종수와 혜미의 반대편에는 부모의 재력 덕분에 하루하루 호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벤이 있습니다. 그 역시 특정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둘과 동일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을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고 두 번이나 종수에게 '가슴 속에 뼈를 울리는 베이스를 느껴라'는 말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사람과 달리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벤의 가슴이 울리는 일이란 흥청망청 놀면서 대마초를 피우거나 절대로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을 일삼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경제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일상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 반복하는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한데, 얄궂게도 경제적으로 궁핍한 다른 두 사람도 할 수 있는 일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종수는 작가를 지망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작품을 쓰기 위한 노력대신 TV를 보거나 다른 일에 집착하고(특히 종수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세번이나 반복하며 허무함을 맛봅니다), 혜미 역시 빚더미 위에서 어렵게 모은 돈을 별다른 고민 없이 근사한 핑계를 대면서 여행하는데 써버리거나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이야기를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음에도 두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버닝의 결말은 '하고 싶은 일'이라는 허울 속에 공허함을 감추고 살던 누군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파멸이 도래할 것을 목도했음에도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거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서 돌이켜보면 모든 것을 걸고 했던 그 행동조차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면에 있던 열등감과 분노를 발산하는 일로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저에게 버닝은 주인공 모두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허한 삶의 모습을 처연하면서도 냉담하게 그려낸 우화처럼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