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맨과 와스프 (2018)
1999년에 개봉한 강재규 감독의 '쉬리'는 한국 영화에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김과 동시에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포부를 안고 시작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엉성한 CG와 허술한 시나리오, 안일한 기획의 삼박자로 점철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내면서 기념비적인 시작이 묘비로 완성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소소한 규모의 액션 영화가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제작이 가능하도록 이야기의 규모를 인물들이 좌충우돌하며 펼치는 소동극 정도로 한정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제작비가 100억 원이 넘게 투입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조차 비슷한 이야기를 그린 마크 포스터 감독의 '월드워 Z'에 비교하면 소동극 정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한국 영화의 소동극 지향과 정반대로 할리우드에서는 막대한 자본을 이용하여 전 지구를 무대로 펼치는 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해 왔는데, 이런 경향에 부합하는 영화들이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입니다. 미국 본토와 유럽, 아프리카를 넘나들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는 우주로 이야기를 확장하더니, 최근작 '어벤저스 3 : 인피니티 워'에서는 우주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목숨을 건 사투를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마블의 확장적 경향과 정 반대로 향한 영화가 바로 2018년 개봉한 페이튼 리드 감독의 앤트맨과 와스프입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2015년 개봉한 앤트맨 1편보다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앤트맨 1편이나 시빌 워는 보지 않은 분이라도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품 자체에서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또한 전작에서도 좋은 액션 장면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슈트와 광선이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되었다는 점과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는 동시에 어벤저스 시리즈와의 연결고리로 양자 세계를 다뤘다는 점은 앤트맨과 와스프가 독립적인 시리즈로서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앤트맨과 와스프의 가장 큰 장점은 점점 할리우드에서 잊혀저 가는 것 같았던 소동극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언뜻 보면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목표 달성하기 위해 갈등을 벌이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앤트맨으로 활약하면서도 동시에 가택 연금을 감시하는 FBI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스캇 랭(폴 러드)의 노력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캇 랭의 가택 연금 여부를 확인하려는 FBI와 그것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스캇 랭의 대립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데, 이런 사소한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무도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 믿고 보는 소동극의 편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어벤저스 3 : 인피니티 워'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감상했고, 거기서 이어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극장을 찾은 분이라면 소동극 정도로 그친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동극 정도의 영화가 매년 샐 수도 없이 제작되는 한국에서 이 정도 만듦새를 지닌 소동극을 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돌이켜보면 앤트맨과 와스프는 분명 일정한 성취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영화적인 재미와 함께 비브라늄 방패나 인피니티 스톤, 토니 스타크의 슈트는 그저 하나의 강력하고 인상적인 아이템일 뿐, 마블의 저력은 크기를 줄여도 유효하게 발휘되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만한 잘 만들어진 소동극은 정말 희귀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