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 (2018)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제안한 소설이나 만화와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연락을 받는 순간부터 아주 큰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은 원작을 그대로 영화에 옮기는 방향으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은 원작의 일부만 차용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길 모두 위험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원작을 그대로 영화에 옮기는 경우는 원작과 비교당하면서 평가절하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영화로 제작될 원작이라면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이 접한 내용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감독의 연출력에서 새로운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면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의미가 퇴색될 테니까요. 2000년 이후 한동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고전 공포 영화들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원작에서 일부만 차용한 경우는 새롭게 투입한 요소가 원작에서 차용한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이질적인 느낌을 주줄 수 있습니다. 가령 원작의 캐릭터는 원작의 내용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텐데 캐릭터만 차용해서 전혀 다른 시나리오 속에 넣는 순간 시나리오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캐릭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남발하는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까요. 이런 선택을 해서 참혹한 결과를 낳은 경우가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아파트'입니다.
김지운 감독의 2018년 작 인랑은 언뜻 보기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오른쪽 길로 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작과 전혀 다른 배경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데다, 무엇보다 강동원 씨와 한효주 씨를 주연으로 선택한 시점에서 멜로적인 요소가 가미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인랑은 원작을 재현하는 왼쪽 길로 향하면서도 오른쪽 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범작에 그쳐버렸습니다.
원작과 비교해서 무엇보다 반길만한 점은 액션씬이 대폭으로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영화 인랑의 원작인 오키무라 히로유키 감독의 1999년 작 애니메이션 인랑을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본 사람으로서 부족한 액션씬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액션의 양적인 측면에서 만큼은 그런 아쉬움을 말끔하게 해소해줍니다. 하지만 액션의 질적인 측면에서는 원작의 정적인 액션이 격렬하면서도 동적인 액션으로 치환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분위기와 더 잘 어울렸던 원작의 액션 장면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와는 달리 영화 인랑은 결말 부분을 제외하고 원작의 기승전결을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때문에 언뜻 보면 영화 인랑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혜리 씨가 연기한 구미경이라는 캐릭터가 추가되면서 새로운 갈등이 추가되었고, 무엇보다 주인공인 임중경(강동원)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원작의 일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화 인랑이 갈등을 일으키는 내적 동기를 멜로로 대체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이야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야기했다는 점입니다. 가령 원작과 영화 인랑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인 '빨간 두건 소녀와 늑대'의 결말은 원작의 결말과는 잘 맞아떨어지면서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데 비해, 영화 인랑은 동화의 결말과는 전혀 다른 훈훈한 결말로 마무리됨으로써 영화의 결말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어긋난 형태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원작에서 주인공 후세가 작품의 제목이자 특수 기동대 내에 암살 조직인 '인랑'에 속한 이유와 동기와 대해 이해할만한 설명이 있었지만 영화에서는 단지 한효주 씨가 연기한 여자 주인공인 이윤희와의 사랑만으로 얼버무려지니까요.
원작 인랑은 제목과 주인공의 캐릭터, 그리고 중간에 언급 동화 모두 '늑대'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완성도 높은 성인 동화를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영화 인랑은 늑대 그림의 바탕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결국은 주인공 자신들도 믿지 않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사냥꾼'의 모습으로 완성했습니다. 완성도 높은 원작에 명망 있는 감독, 연기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배우들이 결함 되었음에도 영화 인랑이 범작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냥꾼이 될 수 없는 늑대에게 기어이 사냥꾼의 탈을 씌우고 싶었던 감독의 선택 때문입니다. 흔히 왼쪽과 오른쪽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 가운데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면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