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사소하지 않습니다만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친구, 존경하는 누군가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기대는 관성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의 몇 가지 점이 내 마음에 들거나 취향을 저격하면 나머지 부분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미리 판단하여 이상적인 마음속 형상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곧 그것을 숭배한다.
하지만 머지않은 현실에 그 금송아지는 깨진다.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의 나쁜 습관과 신체의 특정 부위에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프라고 믿었던 친구가 중요한 기념일에 빈손으로 왔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나의 공손한 질문에 무뚝뚝하게 답하는, 평소 존경하는 선배를 보면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게 갑자기 낯설어진다.
인간관계는 사소한 곳에서 균열과 분열이 일어나고, 은밀하고 교묘하게 어그러진다. "니가 이래서 나는 니가 싫어진다"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내가 그 사람이 싫어지는 지점은 딱히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소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내 취향과 연관돼 있다.
삶이 재미있는 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타인도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 때문에 나를 경계하거나 비웃거나 싫어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나는 완전히 정당한가?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잣대가 있다. 내 자식에 대해서 나는 부모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부모가 하는 말씀은 잔소리라 여긴다.
기술과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터넷과 sns가 활개를 쳐도 우리 마음의 생채기들은 여전하다. 생채기들은 사소하지만 사소한 게 아니다. 우주 가운데 우리 자신의 존재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늘 상처 받고 상처 준다. 나의 상처는 크게 받아들이고 내가 주는 상처에는 둔감하다.
사랑과 우정이 유지되는 건 서로에게 주는 생채기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안에 있기 때문이지 생채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인생 경험이 많다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관상을 잘 본다고 잘난 체할 필요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안다고 믿지만 제대로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왜곡되게 인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받아들일 때 겸손해야 한다. 언제나 내 인식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는 이유가 내 말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소심한 나머지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라는 사실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사소한 걸 결코 무시해선 안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걸로 불쾌해지고, 마음이 상하고 크게 싸우기도 한다. "니가 먹은 설거지는 해놓고 출근해야지" 하며 카톡으로 짜증을 시전하는 아내에게 순간 욱한다. '어젯밤 내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았거든. 니가 과민성 대장증후군 환자의 고통을 알아?' 하지만 이내 인정하고 순순히 답한다. "미안해. 니가 사용할 솥만 설거지해. 나머지는 퇴근하고 내가 할게"
영화 <곡성>에 대한 엇갈린 평가 때문에 아들을 향해 언성이 높아진다. 다소 직설적인 아들이 <곡성>에 대해 그게 영화냐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지. 영화는 취향이니' 이런 일로 열을 내고, 다퉈서는 안 된다. 아들은 <곡성>을 좋아하는 나를 무시한 게 아니라 단지 그 영화가 자기의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다.
오래 본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말은 하는 다른 사람이든 섣불리 잘 안다고 판단하지는 말자.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우리 자신이 잘 알지 않는가. 미리 기대도 실망도 하지 말자. 가능하면 상황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짓는지 적어도 한두 번은 더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내 이해의 폭은 조금 넓어지고 오해와 오류의 폭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