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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파와 포텐셜

투명하지 않은 게 함정

by 밤새

마트에 가서 그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펼쳐놓은 먹거리들을 보면 이것저것 다 먹어 싶고, 사고 싶어 진다. 야채는 몸에 좋으니까, 과일은 입가심에 필수라 먹어줘야 한다. 또 아침 사과는 금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기는 단백질을 보충해야 해서 필요하고, 과자와 초콜릿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없으면 허전하다. 제철 해산물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술은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성인의 권리니 당연히 행사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은 신나게, 카드는 과하게 장을 보고 나면 나를 유혹했던 식재료들은 불투명한 냉장고에 들어가 대기 순번을 기다린다. 우리는 오로지 먹는 것만 신경 쓰며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힘든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설렘을 가지고 구입해서 냉장고에 넣어둔 것들을 곧잘 잊어버린다.


이렇게 OOOL 냉장고는 애물단지 식재료들의 감옥으로 변신한다. 전기세는 365일 꼬박꼬박 잡아먹으면서 말이다.


포텐셜·잠재력(潛在力). 사전을 찾아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에 숨어 있는 힘'이란 뜻이다. 잠길 잠(潛) 자다.


나의 천재 머리로 상상해 보건대 조만간 내부에 CCTV가 달린 냉장고나 사방이 투명한 냉장고가 출시될 듯하다.(검색해 보니 이미 제품이 있군요) 내부에 CCTV가 달려 있으면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다가 지치거나 심심할 때 CCTV를 통해 냉장고 속을 관찰할 수 있다. 오늘은 어떤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시도할지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어서 곧장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식재료의 비율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방이 투명한 냉장고도 주방을 지나칠 때마다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방치해 둔 식재료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뭐라도 해먹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냉장고 속 식재료와 잠재력의 공통점은 바로 불투명한 상자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불투명한 내 속에 어떤 힘과 능력이 숨어있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냉장고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안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식재료들을 방치하듯이 우리는 스스로를 안다는 자만 또는 어리석음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파묻어놓고 산다.


그렇다면 냉파를 잘하기 위해서 선행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외식 줄이기다. 외식은 편하다. 카드만 긁으면 잘 차려진 상을 대령한다. 하지만 편하다, 귀찮다는 이유로 외식을 늘릴수록 냉장고 속 식재료는 시들거나 상해가고, 창의적인 냉파는 남의 집 이야기에 머물고 만다. 외식은 돈을 이용해서 남이 생산한 것을 소비만 하는 행위이다.(현재의 주제에서)


외식은 마치 월급쟁이 직장생활 같다. 월급을 버니 생산적인 것 같아도 그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직장에 소비(소모)하므로 직장생활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가깝다. 창의(創意) 냉장고에서 다양한 포텐셜 재료를 꺼내서 나만의 레시피를 하나 둘 완성하다 보면 조금씩 월급쟁이라는 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냉장고 파먹기'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가? 우리는 늘 잊어먹는다. 나를 살릴 수 있는 식량들(잠재력)인데 말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기 위해 자꾸 주머니를 축내면서 헤매지 말고, 나만의 냉파를 해보자.


내 속에는 대파, 가자미, 삼겹살, 사과, 양파, 시금치, 맥주, 막걸리, 오리 훈제, 주꾸미, 과메기, 오렌지, 토마토 등등... 많기도 하다.





당신의 냉장고에는 어떤 잠재력들이 있는지 자주자주 확인해 보시라. 그 냉장고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자주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부지런한 냉장고 파먹기로 레시피를 여럿 완성하다 보면 어떤 외식보다 맛있고, 몸에도 좋은 당신만의 멋진 요리 - 당신의 정체성 - 가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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