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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May 04. 2021

난생처음 챙겨준 동생 생일

성공은 어렵지만 배려는 쉽다

나에겐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우리는 사연이 많은 남매라 할 수 있다. 아니 솔직히 파란만장한 남매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사람이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피 따위가 대수랴.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반공 표어 포상(이 맞을 거다. 아무튼 무슨 글을 잘 써서 도지사 상인가를 받았었다)으로 원하는 지역으로 전근을 간 시기였다. 젊은 날의 나처럼 그때의 아버지도 쥐꼬리 월급 외 추가 소득에 대해 부푼 꿈을 꾸셨나 보다. 


당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쌌던 개를 비롯해 돼지, 닭 등 가축들을 야심차게 키우셨다. 하지만 초짜가 누구나 그렇듯 기술은 부족하고 욕심은 앞서서 제일 비쌀 때 사들인 가축들을 전염병으로 거진 잃고, 그나마 남은 가축들도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똥값에 처분하고 말았다.


그렇게 아버지의 부업은 쫄딱 망하고 우리는 더 촌골짜기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당시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재수를 한답시고 집에서 나뒹구는,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재수생이었다. 자연히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여동생과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많았다. 


돌봐주는 엄마가 없으니 얼굴에 땟국물을 질질 흘리며 촌동네 애들이랑 몰려다니는 동생이 그땐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었을까. 동생의 그 꾀죄죄한 꼬락서니가 마치 현재 우리 집 돌아가는 꼴 같고, 어엿한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친구들에 반해 안 감아서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인생이 뭔지, 내 인생은 뭐가 문젠지를 고민하는 여드름 투성이의 나를 투영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싫었나 보다. 


그래서 "가시나야, 니는 왜 공부는 안 하고 그렇게 거지 꼴을 하고 동네방네 싸돌아 다니냐"면서 많이도 혼냈던 것 같다. 죄 없는 동생을 말이다.


몇 년 후 나는 집을 나왔고, 그렇게 우리도 연락이 끊겼다. 그 후 우리는 각자 성인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생모, 생부의 존재를 확인할 길 없는 동생은 나보다 훨씬 큰 상처를 안고 살아왔지만, 나보다 밝고 강인하다. 최근에도 아주 크게 안 좋은 일을 겪었지만 씩씩하게 잘 헤쳐나가고 있다.


나 같으면 아버지를 안 보고도 남았을 텐데 - 아버지가 동생한테 잘못을 아주 많이 했기 때문에 - 치매 초기인 아버지 기저귀도 사다 드리면서 자주 찾아뵙는다. 새어머니한테도 엄마, 엄마 하면서 잘 따르고 살갑게 대한다. 내가 못하는 걸 하는 대단한 동생이다. 


못난 오빠는 난생처음으로 동생 생일을 챙겼다. 생일이란 것도 카톡으로 알았다. 통장으로 금일봉(부끄러운 액수지만)을 보냈다. 저녁에 친구랑 맛있는 거나 배달시켜 먹으라면서. 동생이 "어, 우리 오빠 철들었나?" 한다. 철이 든 건 아니고, 들려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아있을 때 작은 걸 챙기는 건 좋은 것 같다.


성공하는 것과 큰돈 버는 것, 부모와 배우자 호강시켜 드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설거지 한번 하고, 전화 한 통 하고, 운전 좀 해주고, 생일을 챙겨주는 것 따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나처럼 유능하지 않거나 유능할 자신이 없는 분은 주위 사람을 잘 챙기고 배려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돈 좀 못 버는 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장점이 된다. 잘난 게 없으니(돈 적게 번다고 못났다는 말은 절대 아니올시다. 오해 없으시길) 싸울 일도 적어지고, 자기주장만 하기보다는 상대방 이야기도 들어보게 된다. 


유능하면서도 자상하고 잘 챙긴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라도 잘 하자.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 사람보다 진심으로 쓴 사람을 기억한다. 죽고 나서는 후회조차도 할 수 없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 중 누가 먼저 갈지 모르니, 살아있는 동안에 배려하고 챙겨주자. 크게 힘든 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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