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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May 15. 2021

단순한 건 지겨워서 싫고 복잡한 건 어려워서 싫다

그러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일은 없다

웹프로그래머에서부터 컴퓨터가게, 뮤직카페, 푸드트럭, 공무원시험까지 내가 끝 - 반드시 큰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만족 혹은 납득이 되는 성취의 도달점을 뜻한다. -을 보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50 평생 해 온 일들의 거의 전부) 나에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삶을 지탱할 만큼 어떤 일을 지속하는 것 말이다. 그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그 일의 가치를 계속 유지한다는 뜻이다.


피아노 반주를 자유자재로 할 수 없는 것은 작곡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걸림돌이 된다. 내가 직접 칠 수 없으니 샘플들을 뒤져야 하고, 객관식 안에서 답을 골라야 하는 답답함이 따라다닌다. 비슷한 수준의 앨범을 계속 발매하는 건 이제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명 가수의 조회수가 뻔하기도 하고, 팔릴 듯 말 듯 결국 성사가 안 되는 곡을 파는 일도 한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작곡 실력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하다.


서울은 선택의 폭이 넓지만 지방은 배움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제한적이다. 실용음악학원이 있지만 맘에 드는 선생님을 찾기 어렵고,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강사들은 적어도 부산 정도는 가야 있다. 나이 많은 성인은 주로 취미반으로 치부하기에 설렁설렁 가르쳐주는 학원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곡 쓰는 데 빠져서 한동안 미뤄뒀던 작곡 공부를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리저리 뒤지고 고민 중이다. 개인레슨, 실용음악학원, 유튜브독학... 온라인 강의는 7월 개강 예정인 강의를 벌써 하나 선구매해뒀다.


반주법 공부를 위해 유튜브를 뒤져보니 우선 12키 스케일 연습과 코드 자리바꿈 연습을 지겹도록 하라고 한다. 그 영상을 보고 처음 떠오른 생각이 '하기 싫다'였다.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창의성을 요하지 않는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이런 단순한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나는 이 따위 일을 할 위인이 아닌데...' 이런 생각. 내가 해왔던 일이 단순한 건 팩트다. 지금 내가 하는 알바도 단순하다. 나 아닌 누구라도 대체 가능하다. 


이렇게 단순한 일을 따분해하고 거의 '경멸'하면서도 보다 차원이 높은 일을 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단계는 어려워서 싫다고 하는 내가 갑자기 보였다. 정말 아이러니한 나였던, 나인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중도하차의 원인이 어쩌면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일을 무시하면서도 단계가 있고, 시간이 걸리고, 인내가 필요한 일은 또 싫어하는 습성. 오로지 빨리 열매 맺기만을 바라는 간사한 가벼움.


흥하는 것은 운도 따라줘야 하는 결과에 해당한다. 흥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에 쏟은 내 삶이 불성실했다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흥했다 할지라도 그 속(실상)이 불성실할 수 있다는 명제는 성립한다.


최근 <언스크립티드>을 읽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정했으면 그것에 해당하는 행위를 매일 하라는 말이 참 인상 깊었다. 지금까지의 내 방식은 주로 몰빵 스타일이었다. 책을 보기 시작하면 책만 보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영화만 보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노래만 만드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에 좋은 방식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피아노도 치는 습관을 들이려 한다. 자연의 이치를 보더라도 물이나 거름을 한꺼번에 많이 주면 식물이 죽는다. 그래서 이런 습관 들이기는 여전히 나에게 숙제다. 이제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서 습관을 들이기 위해 습관 어플의 도움도 받고, 부담감, 지겨움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세세한 방법들을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하려 한다. 처음부터 한 숟가락 먹는 게 힘들면 반 숟가락부터 먹으면 된다.


어제 책을 읽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C#, D, Eb까지 스케일을 쳐봤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금방 익숙해졌다. 아무래도 피아노를 아예 놓지 않고 틈틈이 쳐왔던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 하나씩 하나씩 하면 되는데, 언제나 미리 겁먹고, 미리 지겨워하고, 미리 포기한다.'




사람은 스킨십이 있으면 더 친해진다. 애정이 더 깊어진다. 모든 사물과 가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니터를 통해 보는 전자책이 공허하지만, 맘에 와 닿는 구절을 노트에 써보면 펜의 감촉과 종이의 질감과 종이에 남는 흔적이라는 실물 때문에 그 책과 구절에 더 애정이 간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실물로서 내 뇌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스크립티드>에서 언급한 것처럼 '몽상의 박제'가 될 뿐이다.


나는 '깊이 들어가니 어려워져서 포기했다'라는 변명보다 '결과는 차치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실물로서 내가 추구하는 그 가치와 대면하고 스킨십했다. 그러므로 후회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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