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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l 27. 2020

짐자전차와 안성탕면 3개 + 계란 2개

고맙다! 친구야, 다른 무슨 말을 더 할까.

반평생 삶을 정리하는 글에서 이 친구를 빼먹으면 섭하지. 가족이든 남이든 이타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 나밖에 모르고 살았단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립주택 단칸방 시절부터 5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내 곁에 그대로 있어주는 고마운 친구 J.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집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됐다. 차비를 아껴서 짤짤이(동전 노름)나 고스톱 밑천으로 쓰기 위해서 나는 줄곧 걸어 다녔다. - 짤짤이에는 소질이 없었고, 고스톱은 소질이 좀 있었다. ㅎㅎ -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버스보다는 변두리였던 그 동네 뒷길로 걸어 다니는 게 더 운치가 있었고, 그건 하굣길의 낭만이었다.


중 1 때였나? 그날도 어김없이 난 집으로 가는 뒷길로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었는데, 짐자전차 - 뒤쪽에 짐을 실을 수 있도록 쇠기둥을 높이 올린 덩치가 큰 자전거 - 를 탄 낯선 놈이 뒤에 타겠냐고 물어보는 거다. 나랑 같은 동네에 살고, 나를 안다는 것이다. 우선 중학생이 짐자전차를 탄 꼴이 좀 웃겼다. 자전거가 J보다 덩치가 더 컸으니까. 나는 짐자전차 뒤에 짐짝처럼 타는 게 영 모양새가 빠진다고 생각했지만, 호의가 고맙기도 하고 어쨌든 타고 가면 편하니 얻어 탔다. J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우리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업으로 돼지, 개 등을 키워서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 부산 변두리 지역으로 전근을 오셨다. 아버지는 정부 정책과 관련된 표어 등을 잘 쓰셔서 당선이 많이 됐기 때문에 포상으로 전근이 가능했다. 그 동네 분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셨고, 친구 J네도 그랬다.


J는 키도, 덩치도 나보다 컸으며 하는 짓이 어른스러웠다. 난 좀 촐싹대고 까불랑거리는 다혈질이었는데, J는 진중하고 과묵한 스타일이랄까? J 집 농사의 주종목은 오이와 대파였다. 오이 하우스를 돌보고, 수확철에는 수확을 거드는 게 J의 일상이었고, J와 친해지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그 일에 동참하게 된다.


내가 J에게 매료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꺼지기- 거적(비닐하우스 보온을 위해서 짚으로 엮어 만든 덮개) - 덮는 솜씨였다.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그런 거적이 없어졌는데, 당시에는 해지기 전에 꺼지기를 덮어주는 게 비닐하우스 농사에서 중요한 필수 코스였다. 돌돌 말려있는 꺼지기를 대나무로 톡톡 치면서 순식간에 한 동을 덮어버리는 J의 모습은 정말 멋져 보였다. 손이 안 보이는 솜씨. 보통 내가 겨우 반 동을 덮고 있으면 J가 한동 반 정도 덮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난 그때까지 농사일을 해본 적도 없었고, 육체노동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젬병이라서 어린 나이에 집안의 농사일을 그렇게 척척 거드는 친구가 존경스러웠다. J는 경운기로 밭갈이, 약 치기 등도 불평 없이 척척 해냈고, 대파 수확철에는 인근 장에 나와 함께 대파를 팔러 가기도 했다.


그때 J네는 다섯 식구가 연립주택 단칸방에 살았다. 학교를 마치면 J 집에 가서 안성탕면 3개에 계란 2개를 풀어서 연탄불에 끓여먹는 게 우리 일과였다. 농사일이 고되기 때문에 J네는 참으로 쓰기 위해서 안성탕면을 박스채로 사두었기 때문이다. J는 워낙에 많이 끓여본 솜씨라 예술적으로 끓였다. 그때 J 집에서 얻어먹은 라면과 밥이 나의 피와 살이 됐나니 어찌 내가 J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시절 아버지와 새엄마의 불화 때문에 우리 집은 나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나는 우리 집보다 J 집에서 밥을 더 많이 먹었던 것 같다. J의 어머니는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면 꼭 더 먹으라고 권하셨다. 위장이 부실했던 나는 두 그릇이 무리였지만 거절과 권함이 두세 번 오가다 보면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두 그릇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전형적인 시골 밥상이라 소박했지만 반찬이 참 맛났다. 어느 설날에는 땅콩을 잔뜩 넣은 강정을 집에 가서 먹으라며 한 보따리 챙겨주셨는데, 강정을 좋아한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그 당시 집에서 받지 못한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J의 어머니를 통해서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안 어울릴 것 같은 J와 나는 단짝이 돼서 저 멀리 부산 시내에 500원에 영화 두 편을 보여주는 삼류극장에도 같이 다니면서 그 시절을 즐겁게 보냈다. 둘이서 지리산을 등반한 적도 있었다. 5000원짜리 단화를 신고 멋모르고 갔었는데, 비는 홀딱 맞고, 신발은 걸레가 되고, 친한 척하는 모르는 청년 놈들에게 식량은 다 뺏겨서 거지꼴이 돼서 하산했다. 그 꼴로 진주역 간이의자에서 하룻밤 노숙을 했는데, 이게 제일 기억에 남네.


오래전에 J의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배에 복수가 차서 응급실에 가셨다가 몇 번의 수술 후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두 분 다 너무 일찍 가셨다. 힘든 농사일로 고생만 하셨는데 말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어른이 돼서 어머니를 찾아뵙고 맛있는 밥 한 끼, 용돈 한번 못 드린 내가 정말 돼먹지 못한 놈이구나 싶다.


나의 파란만장한 삶 때문에 J와 연락이 끊겼던 시절은 있지만, 어쨌든 J는 그때처럼 형같은 친구로 듬직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사회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정말 별 볼 일 없는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내 꿈이 어설픈 걸 알면서도 지지를 보낸다. 다만 가까이 있지 못해서 아쉽다. 과묵하지만 의외로 소심한 J. 나한테는 속마음을 잘 털어놓거든. 예수처럼 세상 짐 다 진 것 같은 J가 때론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바람 같은 자유주의자면 세상이 잘 돌아가겠는가?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묵묵한 희생정신, 기사도 정신이 있어야지.


나이 들어서 시골에서 옆집에 같이 살자는 말은 이젠 꺼내지 않는다. 얼마 전 늦은 나이에 말단 공무원에 합격한 J도 얘 둘 키우느라 빠듯하고, 그나마 몇 푼 있던 돈까지 다 까먹은 나도 거지 중에 상거지라 전원생활의 로망은 현재는 그냥 로망으로만...


사업, 장사, 막일, 운전기사 등 우여곡절을 겪었던 J는 공무원이 되고부터 좀 안정이 되긴 했지만 쪼들리는 형편에 가정을 돌보는 데만 치우치다 보니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우짜노 친구야, 사는 게 아주 재밌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재밌어야지. 니캉 내캉 안성탕면 끓여먹으며 히히낙락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평생을 살아버렸네. 니는 얼굴에 저승점이 늘고 난 귀 밑에 흰머리가 늘어버렸구나. 아이구.


어쨌든 친구야, 인생 뭐 있나? 너무 심하게 고민하지 말고, 짐 지지 말고... 그런다고 만사가 사람 뜻대로 되더냐? 남은 삶이라도 재미나게 살아야지. 니랑 내랑 요래 오래 알았으니 인연 중에 상 인연 아이겠나?




같이, 잘 살아보자이~ 고맙데이!!! 친구야~


<조용필 - 친구야>

https://www.youtube.com/watch?v=BDV0PQp5Ius



<안재욱 - 친구>

https://www.youtube.com/watch?v=zbnLzCB9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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