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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Sep 16. 2020

오래가는 인연

친구보다 고마운...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갈등을 한다. 단편소설이랍시고 적기 시작했지만 소설 쓰기는 역시 어렵기 때문에 진도가 잘 안 나간다. 대부분 에세이. 에세이는 사생활을 노출해야 하고, 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과연 이런 걸 노출할 필요가 있나를 우선 갈등하게 된다. 그러다가 글을 쓰기로 결정하는 제일 큰 기준은 이 기억을, 이 사건을 기념할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동할 때 기록을 해놔야 더 나이 들었을 때 추억을 꺼내볼 수 있을 것이다. 혼자만의 일기장도 좋지만 공개를 해서 공감하는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내가 컴퓨터 수리점을 접고 푸드트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있어 큰 사건이 있었다. 손가락뼈가 부러져나가는 사건. 이 사건은 내게 너무 큰 충격을 줬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썰을 풀어보겠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전국의 축제장을 다니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내가 사는 소도시의 작은 공원에서 생과일주스와 커피를 팔았다.


그때 오늘 내게 밥을 사준 이 누님을 만났다. 누님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모뻘이다. 누님은 내 건너편 자리에서 아이스크림과 믹스커피, 음료수를 팔았고, 가끔 엉성한 솜사탕도 팔았다. 나는 고물 트럭을 인천까지 끌고 가 나름 유명한 푸드트럭 개조 공장에서 아주 예쁘게 차를 꾸며왔지만, 이 누님은 옛날 방식대로 초라한 가판대에서 장사를 했다. 장사를 마칠 때마다 그 가판대를 트럭에 실으며 여자 혼자 힘들어하길래 도와드렸고, 그러다가 친해졌다. 누님은 솜사탕 장사가 마진이 좋아서 서울 업체에 기계를 주문해 놨고, 어디 가서 기술도 배우셨단다. 그런데 기술 배워주는 데가 어설픈 곳인지 누님의 솜씨는 어설펐다. 누님의 꿈은 각양각색의 동물 모양 솜사탕을 만드는 것인데(새 기계가 오면), 실제 작품은 예쁜 원형도 못 되는 찌그러진 솜사탕이었다. 그런데도 그 공원에 솜사탕은 그 누님 독점이었으므로 애들은 잘도 사 먹었다.


사연을 듣자 하니 동물 모양 솜사탕을 만들 수 있는 고급 솜사탕 기계를 서울 업체에 주문하고 입금까지 했는데, 물건을 차일피일 미루며 안 보낸다는 것이다. 내 느낌에 그 업체는 나이가 많은 시골 아줌마라 무시하는 것이고, 돈을 떼먹든지 어설픈 기계를 보내든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잘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쪽 업계 사정을 대강 파악한 후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렸다. '경찰', '고' 이런 단어를 써가며 강하게 대응하시라고 했던 것 같다. 결국 누님은 돈을 돌려받았고, 내게 고마워하셨다. 나는 내가 잘하는 걸로 미미한 도움을 드렸을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 한 번은 뒷산에 운동 갔다가 내려오니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당시 이 누님은 운동회마다 다니시며 음료수를 비롯한 주전부리를 팔고 계셨다. 나는 누님께 전화를 드릴까 말까 하다가 '한 푼이라도 벌면 좋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하는 맘으로 전화를 드렸다. 이 날 운동회는 소문이 안 났는지 누님만 장사하러 오셔서 큰돈은 아니지만 제법 수입을 올리신 것 같았다. 이 날 누님은 고맙다며 추어탕을 사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내가 여태 살면서 인복이 정말 없는 사람인데, 고맙소!" 그러니까 누님 말씀은 나를 알게 된 것이 인복이 있는 거란 말씀. 나는 우리 책 <보통사람들>의 공저자 A 작가님처럼 이웃과 정을 나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콩가루 집안에서 자란 덕택인지 '천상천하 유아 독종'이 오랜 세월 나를 지탱하는 철학이었다. 그런데 내가 인복의 대상이라고? 얼떨떨.


누님은 젊은 시절 이혼한 후로 수십 년을 난전 장사를 해오셨는데, 아버지 밑에 있다가 사춘기를 지나 자기에게 온 두 자식을 키우느라 그야말로 일 밖에 모르고 살아온 듯했다. 그 처절한 생활력은 정말이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온 덕택으로 누님은 제법 부자셨다. 시골집이지만 집도 두 채고, 당장 장사 안 하면 입에 풀칠을 못하는 그런 형편은 아니었다. 나는 이혼하고 젊은 시절부터 억측스럽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더욱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 지금 이 누님은 여름철엔 등산로 입구에서 음료수를 팔고, 겨울철엔 동네에서 붕어빵을 파신다. 붕어빵은 하나를 더 주고, 팥을 듬뿍 넣어주기 때문에 불티가 난다. 하루 종일 가스불 앞에 서서 가스냄새 맡아가며 빵틀을 뒤집고 반죽을 붓는 그 일은 옆에서 지켜보니 생 + 상 노가다다. 게다가 질투하는 이웃 상인들이 불법 노점상이라고 고발도 여러 번 해서 철거반을 피해 도망 다니는 등 몸고생, 맘고생도 많이 하셨다.


나는 장거리 출장이 많은 네트워크 관련 일을 할 때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러 오뎅도 끼워 드리고, 수다를 떨다가 오곤 했다. 누님은 가을철이 되면 동네 과수원에서 열과 단감을 큰 광주리에 사셨다가 나를 불러서 통째로 주곤 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공무원 공부하느라 두문불출하면서 연락이 뜸해졌으나 중간에 힘내라고 장어를 한 번 사주시고, 시험에 떨어졌을 때 또 힘내라고 멀리까지 가서 장어를 사주셨다. 내가 밥 사드린다고 만나자고 해도 결국은 누님이 내셨다.


기자생활 할 당시 한 번 인사드리러 갔었는데, 또 음악 한다고 찾아뵙기가 민망해 생각은 종종 났지만 실행을 망설이고 있었다. 반백의 나이에 직업(?)을 너무 자주 바꾸는 게 좋아 보이진 않을 거 같아서. 그런데 최근에 2G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신 모양이다. 카톡 친구 목록에 누님이 보인다. 요즘 책과 앨범 홍보하느라 들떠 있는 나는 누님께도 용기를 내서 책과 앨범 링크를 걸어 드렸다.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인사와 함께.


그런데 오늘 연락이 오셔서 또 저녁을 먹자 하신다. 오늘의 메뉴는 명태조림이다. 요새 유행하는 모양이다. 나는 위장이 안 좋아 먹는 데에 별로 취미가 없지만, 반가운 얼굴도 보고 책도 선물하러 나간다. 이 누님의 폰에는 아직도 내가 '커피차'로 저장돼 있다. 커피 팔던 놈이 네트워크 일 하다가, 기자 하다가, 이제는 음악하고 책 쓴다고 하니 저 놈 정체가 도대체 뭘까 싶을 거다. 그래도 여전히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다. 사천 출신 가수 박서진처럼 대박 나라고 하신다. 유튜브 링크 터치도 할 줄 몰라서 카톡으로 보낸 내 노래도 아직 못 들어 보셨단다. 터치하는 법도 가르쳐 드렸다.


누님과 나는 어찌 보면 공통점이 없다. 세대 차이도 많이 나고, 하는 일도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계속 좋은 감정을 가지고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친구라는 이름만 있고 진정성도 없고, 연락도 없는 사이보다 훨씬 낫다.


이 누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저작권료 많이 들어오면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하고 돌아왔다. 우리는 의외로 오래가는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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