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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l 26. 2020

아, 그 누나 M

따뜻하고 조그마했던 그 손

어린 시절 대부분 그렇듯 우리 패거리(나와 내 친구들)들은 그 시절에 재미로 교회에 나갔다. 일요일에 집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물론 이성교제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내 친구들은 고1이었고, 나는 실업계를 자퇴하고 인문계를 가기 위한 재수생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D교회는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사실상 시골 변두리에 있었고, 그 누나의 집은 부산 시내였다. 친한 친구를 따라 멀리 변두리의 D교회까지 다닌 것이다.


변두리 촌놈인 우리들과 달리 그 누나는 뭔가 귀티가 났다. 하얀 얼굴에 작고 아담하고 앙증맞은 그런 스타일이었다. 고생은 안 해봤고, 점잖은 중산층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것 같은 스타일. 한 해 선배 격인 그 교회 누나들은 자기들 또래인 고2 형들이 있는데도 우리를 더 예뻐해 주고 우리와 더 친했다. 우리도 무뚝뚝한 경상도 촌 세계에서 그런 따뜻함과 살가움을 받아본 적이 없 터라 누나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참 즐거웠던 것 같다.


그 누나 M의 얼굴만 몇 번 봤고, 데면데면하고 지내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이브 때는 교회 학생회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밤을 새워 성도들 집을 일일이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다. 크리스마스니 축복을 해주는 행사였던 것 같다. 그때 M이 내 친구와 나를 양쪽에 세워놓고 손을 잡고 걷자고 했다. 나는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생전 처음 잡아보는 여자의 손이라니. 가슴이 떨렸다. 그것도 이렇게 인형 같고 아기 같은 누나가 손을 먼저 잡자고 하다니... 놀랠 노자다!!!


우리는 늦은 새벽까지 돌아다닌 것 같은데 M은 그 작은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손에 땀이 좀 차긴 했지만 나는 밤새도록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설레는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많이 친해졌다. 주로 누나가 대화를 리더하고 우리가 대답을 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우울한 재수생 시절, 주제넘 심각하철학적인 고민들로 시커먼 얼굴에 여드름 투성이었던 나, 회의적인 염세주의자였던 나. 그런 시절에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 날 새벽이었다.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주고 토닥여주는 그 누나는 외모 못지않게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늘 혼자라는 차가운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내게 예상치 못한 따뜻함이 훅 치고 들어온 날.


그 후 누나 M을 비롯한 고2 누나들과 우리들은 을숙도에 자전거 타고 놀러도 가고, 누나들 자취방에 놀러 가서 라면도 얻어먹고 하면서 꽤나 재밌게 지냈다. 그 당시에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가 히트를 치고 있었는데 분위기 있는 노래였다. 나는 코드 몇 개 짚을 줄 아는 어설픈 실력으로 그 노래 전반부 8마딘가 16마딘가를 몇 번 연습했었는데, M과 이야기하던 중에 교회에 있던 기타를 치며 그 노래를 불렀다. 나의 어설픈 기타 실력에도 M은 너무너무 좋아해 주었다. 또 듣고 싶다고 반복해서 쳐달라고 했다.


사랑이 떠나간다네 이 밤이 다 지나가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은 붙잡을 수는 없겠지

딱 요까지 연주했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해의 더 촌구석 동네로 이사 가면서 D 교회, 교회 누나들, 친구들과도 이별하게 된다. 나는 시골집에서 독학으로 재수를 하면서 - 사실 공부도 안 했다 - 더더욱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갔다. 대인기피증까지 올 정도로 사람이 싫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그런데 누나 M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수십 번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누나도 나를 이성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추측에 확신을 준 사건은... 누나가 편지에 자기 사진을 동봉해 보낸 것이다. 뭔가 정돈되고 깔끔한 방, 상 앞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다가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사진은 당시 나에겐 비너스의 여신상 이상이었다.


나는 책꽂이와 세트로 판매되던 피노키오 책상의 책꽂이 형광등 바로 밑에 그 사진을 붙여놓고 날이면 날마다,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아무 일 없거나 지루하거나 그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사진 속 나를 보는 것 같은 누나의 눈과 함께. 그걸 보는 시간이 힐링의 시간이요. 기쁨의 시간이었다. 형은 음악 한다고 집을 나가 있었고, 아버지는 새엄마와 연일 다투느라 누구도 나에게 신경 써주지 않던 그 시절, 그 누나 M이 그렇게 나에게 위로를 줬다.


지금도 안타까운 건 그 당시 재수생, 낙오자라는 열등감 때문에 M의 관심에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편지도 누나가 훨씬 많이 보낸 것 같고, 전화 통화도 '해서 뭐하나 해서 뭐하나' 하다가 어쩌다 한 번 한 것 같다. 얼마든지 자주 전화할 수 있었고, 전화하러 공중전화 박스에 가던 그 길이 그렇게도 설렜으면서도 말이다. 그토록 얼굴도, 마음씨도 예쁜 누나와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해보고 연락이 끊겨버렸으니 용기 없는 자는 있는 복도 스스로 찬다는 게 정말 정말 맞는 말이다.


어른이 되고 언젠가 M이 너무 보고 싶어서 친구와 무작정 그 누나 동네를 배회한 적도 있다.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그 누나는 힘들었던 내 사춘기 시절, 잊을 수 없는 로즈다. 그 후 어떤 스킨십도 그때 그 누나의 작고 아담한 손만큼 설렘을 주지는 못했으니까.


지금쯤 남편과 자식을 둔 주부로 곱게 늙었겠지. 지금에서야 제대로 고백할게. 나도 누나가 너무 좋았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산 것 같았던 누나.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풋풋했지만 말이야.




부디 행복하소서 누나여!


<김종찬 - 사랑이 저만치 가네>

https://youtu.be/bki6HQ-6q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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