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새 Aug 09. 2022

잦은 실패와 실수를 견디는 힘

"치킨이나 시키든지..." 퇴근이 다가오는 시간에 아내와 통화를 하니, 라인댄스를 배우고 온 날이라 피곤해서 저녁을 차리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 강요할 수 있는 나이대가 아니므로 순순히 치킨집을 검색한다. 나는 고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배달음식은 고기나 밀가루 음식 말고는 메뉴가 딱히 없기도 하다. 아니, 진짜 없다기 보단 없다고 쉽게 생각한다. 최근에 맛있게 먹은 치킨집이 없으므로 네이버나 구글 평을 안 보고, 오래전에 먹어봤는데 맛이 괜찮았던 프랜차이즈에서 시키기로 한다.


나름 담백하고 무난할 것 같은 메뉴를 고르고, 전화로 주문하면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잘 나가는 맛있는 메뉴라 한다. 배달비를 아끼기 위해서 애써 가게에 들러 포장까지 해왔다. 결과는... '실패'다! 2만 원의 가치가 턱없다. 솔직히 버리고 싶다. 국물까지 넘쳐서 찐득한 액체가 밥상에 다 들러붙었다.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더 짜증이 난다. 


결국 "치킨이나 시키든지..."라고 한 아내에게 원망의 한마디를 던진다. 아내도 앞으로 1년간 치킨 '치'자도 들먹이지 않겠다고 맞받아친다. 이 치킨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는 실패를 했을 때, 실패에 대한 원망으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나같이 까다로운 사람이 맛있는 치킨 선택에 성공할 확률은 2할이 될까 말까다.


이른 아침에 초등학교 동창한테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다. 몇 년 만에 온 전화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최종 용건은 '돈'이었다. 식당도 하고 바도 했던 친구인데, 쫄딱 망해서 밤업소 영업을 한다고 한다. 당장 생활비가 없다고 돈을 좀 꿔달라고 한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나는 평소 친구와 돈거래를 안 하므로 당연히 거절을 했어야 맞다. 나도 쪼들리니까. 그런데 어쩐 일인지 빌려주고 말았다. 50이 다 돼서 가난하게 사는 나도 면목 없지만, 정말 망해서 밤거리를 헤매는 그 친구는 더 불쌍하게 느껴졌을까. 하지만 빌려주고 나니 불안하고 기분이 안 좋다. '이렇게 소액을 빌리는 잔꾀로 여러 친구한테 빌리고 잠적하는 건 아닐까. 약속한 기일까지 갚지 않으면 독촉을 해야 할까? 한 번은 하겠지만 계속 안 갚으면... 결국 포기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돈을 빌려준 행위 자체가 나의 가치관에 반하는 순간적인 '판단의 실패'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좀 편하게 해 보려고, 음악에만 집중해 보려고 활황일 때 투자한 주식이 심하게 폭락했던 날, 나는 직장에서 보안 관련 제법 큰 실수를 해서 경위서까지 썼다. '큰일 났다'는 절망감에 빠져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인베스팅닷컴에는 '주식투자를 하려면 반토막 폭락은 각오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각오와, 상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주식투자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말에 바람을 쐬러 가기 위해서 검색을 했다. 책 <역행자>에 의하면, 안 가본 곳에 가야 뇌가 운동을 한단다. 검색한 결과, 50km 거리의 바닷가 - 나름 알려지지 않은 장소라고 판단 - 에 갔다. 하지만 '실패', 기대 이하였다. 내가 사는 동네보다 습하고 덥고, 여러모로 더 못했다. 왕복 100km의 여행을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서 검색부터 하는 루틴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엔 주로 '유명지'만 노출되니까. 전에 그냥 지나가다가 괜찮아 보여 차를 세우고 아내와 산책했던 길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났다. 검색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새로운 방법인 거다.


삶의 여러 순간에서 실패했다고 자각하는 순간, 왜 심한 자괴감이 들까? 마치 끊기로 한 술을 결국 저녁에 다시 입에 대고 나서,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한, 그런 느낌이다. 그건 기본값을 성공에 두기 때문인 것 같다. 디폴트가 성공이라고 믿다 보니 실패하는 내 모습에 당황하고, 그 모습을 보고 한번 더 흔들리게 된다.


어쩌면 성공하는 사람들은 기본값을 실패로 정의하고, 끊임없는 실패와 실수에 담담한 사람이 아닐까. 에디슨처럼 말이다. 우리가 맛있는 치킨가게를 고를 때 취하는 정보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가 아니다. 블로그나 포털에 올라온 평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으며, 내 과거 기억은 또 얼마나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개리 마커스가 <클루지>에서 얘기하듯 우리가 최종 판단에 사용하기 위해서 취하는 정보들은 조야하고 오류 투성이인 데다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뇌와 감정 또한 오류 투성이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삶의 수많은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다. 우리는 인생의 성공률을 몇 할로 잡아야 할까? 성공률을 턱도 없이 높게 잡아 놓고, 날마다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니 어쩌다 한번 운 좋게 잘되는 걸 행복해 해야 하는 판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렇거나, 잘 안 되는 게 당연한 판. 맛없는 치킨에 2만 원이 날아가고, 입을 버렸다고 해서 부부싸움까지 할 필요는 없다. 맛집을 잘 못 고르는 우리의 판단력과 광고성 정보가 난무하는 현실을 인정한 후, 시원한 수박으로 기분을 전환하고 다시 할 일을 하면 된다.


몇 년 만에 뜬금없이 전화 와서 부탁하는 친구에게 돈을 꿔준 게 후회된다면, 이번 기회에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의 마음을 더 이해하려 노력해 보고, 다음부터는 빌려주지 않으면 된다. 실수로 경위서를 썼다면 그 업무를 볼 때는 더 조심하면 되고, 조심했는데도 또 실수를 한다면, 설령 퇴사를 한다 해도 또 다른 살 길은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실패나 성공이 아니라 에너지다. 성공 후에도 에너지가 고갈되면 슬럼프에 빠진다. 주식이 폭락하고, 배달음식이 맛이 없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연애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계속 뭔가를 하는 에너지! 주식이 폭락하면 그 기회에 주식이나 경제 공부를 더 하면 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사업으로 성공할 공부를 해봐도 된다.


불굴의 한국인이라서가 아니가 삶을 움직이는 힘 자체가 에너지다. 잘할 수 있었는데 잘못해서 억울하다 생각하지 말자. 잘못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과 디폴트 값이 이미 있었다. 우리는 돈을 날릴 수 있지만, 또 벌 수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리석지만 또 한 순간은 지혜로울 수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뭔가를 잘 못하고 실수투성이지만, 연습과 연마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다.




생각한 후에 움직이려 하지 말고, 계속 움직이면서 생각하자.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실패와 실수가 있을 것이다. 기본값이니까. 이 세상은 '완벽히 생각한 후에 완벽히 행동하기'에 적당한 세상이 아니다. 게다가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매거진의 이전글 디테일은 변화를 가져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