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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an 23. 2023

생계에 매몰되지 않는 삶

하체는 내복 두 벌, 방한용 스타킹, 담이 든 바지, 방한용 부츠까지. 상체 역시 내복 두 벌, 목티 두 벌, 조끼에 오리털 파카. 얼굴은 바라클라바에 헬맷까지. 헬멧 옆면에는 블루투스 기기의 불빛이 번쩍번쩍한다. 명절에는 배달료를 좀 더 준다기에 일을 하다가 외할머니 댁에 온 아들을 잠깐 보러 온 터다.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이모부(나)는 이번에도 조카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까르르르" 자지러지게 웃는 조카. 순식간에 퇴사하고 배달원으로 변신한 이모부. 동서 형님은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고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하지만, 사실 '그 좋은 직장'은 '그리 좋은 직장'이 아니었다.


대출 원리금의 압박으로 투잡을 시작했던 두어 달 전부터 빚과 생계에 휘둘려 음악과 멀어지는 게 제일 두려웠다. 책이야 어떻게든 짬짬이 읽으면 되지만, 피아노 연습은 더 많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라 돈벌이를 핑계로 하루이틀 연습을 게을리하다 이전에 기타처럼 흐지부지될까 두려웠다. 실패의 반복이.


요즘 시간의 효용과 효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넉넉한 부자가 되기 전까지는 생계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필요악이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가 숙제다.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시간대나 주위 환경에 따라 집중도가 다르다. 나는 아침 기상 후와 밤 취침 전이 집중도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시간 쪼개기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와 있지만, 집중에 있어서는 시간을 너무 잘게 쪼개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 독서든 피아노 연습이든 그 대상이 내 뇌와 마음에 스며들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밥벌이의 장점은 오전 시간을 출근하지 않고 활용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시간에 종이책도 읽고, 피아노도 칠 수 있다. 직장에서 남는 시간에 종이책을 못 읽게 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궁여지책으로 전자책으로 바꿔 읽었지만, 소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눈치 보며 읽는 전자책은 확실히 집중도가 많이 떨어졌다. 직장 생활도 물론 저녁의 자유 시간이 있지만, 퇴근하고 오면 우선 쉬고 싶고, 저녁도 먹어야 하고, 힘들게 일하고 온 아내의 투정도 들어주다 보면 그 짧은 자유 시간이 흐지부지 후딱 가버린다.


서너 달 전 잠깐 활동했던 직장인 밴드의 여성 보컬이 아델의 <Someone like you>를 피아노 솔로 반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반주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해서 악보를 뽑아보니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는데, 역시나 보기만큼 만만치는 않았다. 게다가 <Someone like you> 연습을 시작한 이후로 대출이자가 팍팍 오르고, 원리금이 월급만으로는 감당이 안되고, 대출을 연장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통에 더더욱 연습이 지지부진하고 진도가 안 나갔다. 게다가 직장 내 인간관계 갈등까지...


'도대체 언제 끝낼 수 있나' 싶게 지루하게 붙잡고 있던 <Someone like you>가 드디어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물론 너무 루즈하게 연습해서, 부분 연습을 끝까지 한 후 다시 전체 연습을 할 때 또 어느 정도 헤매긴 하겠지만 어쨌든 악보상 끝을 향해 간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오전 시간의 힘이 컸다. 일어나서 볼일 본 후 딴 거 안 하고 피아노연습부터 하니 집중이 잘 됐다. 게다가 집에 나 혼자 뿐이니 더 집중이 잘 됐다.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주 크게 여기는 가치 - 음악, 독서, 글쓰기 - 를 포기하지 않고, 맥락을 끊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매몰'이란 무서운 단어다. 삼풍백화점 사건이나 갱도 매몰을 생각해 보라. 밥벌이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삶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밥벌이가 삶 자체인 것처럼 산다. 슬픈 일이다. 나는 가난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투쟁을 해서라도 - 사실 투쟁을 해야 한다 - 그런 삶을 피할 것이다.


생계에 매몰되지 않고 피아노를 칠 수 있어서 좋다. 힘이 빠진 자연스럽고 긴 내 손가락이 건반에 살포시 내려앉는 느낌이 좋다. 일정 연습 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쳐질 때는 마치 내가 손열음이나 조성진이나 이루마나 김형석이나 조영수가 된 것처럼 상상하며 친다. '나도 언젠가 음악가가 될 수 있을까, 음악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설령 밥벌이를 못하더라고 음악으로 가치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양원 위문 공연이나 카페 라이브도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선명한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보는 것도 즐겁다. 이 아날로그의 재질이 내게 안도감과 편안함을 선사한다. 이런 음악, 독서, 글쓰기는 내 뇌를 정화시켜 주기도 한다. 


전날 밥벌이를 위해서 정신없이 오토바이를 달리던, 뭔가 자본주의에 오염된 것 같았던 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긴장을 야밤의 막걸리와 맥주로 달래다 아침에 속이 안 좋은 나, 온갖 잡무 -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할 일이 많아지는 우리다. 식당에 가면 서빙로봇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테이블에 직접 놓아야 하고, 마트에 가면 셀프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일일이 찍어야 한다. 맛집에 가려면 검색을 해야 하고, 연말정산도 해야 하고... 선택선택선택... 피곤한 선택들의 연속이다 - 에 시달리던 나를 달래주고 정화시켜 준다. 안도감이 든다.




생계에 매몰되지 말아야지.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연습이 제법 손에 붙는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매트릭스에 가만히 있으면 휩쓸린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시간이 진할수록, 힘든 밥벌이도 즐겁게 해낼 수 있는 것 같다.


오늘 연습  - Someone like you 피아노반주 후반 4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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