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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pr 03. 2023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통제(統制)라

많은 책들에서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의 감정을, 습관을, 돈을, 시간을 통제하라고. 별생각 없이 살 때는 당연히 내가 나를 통제하는 줄 믿었지만, 오래 살아보고, 수많은 실패를 겪어보고, 남들만큼 이룬 것도 거의 없는 나를 보면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나는 오히려 통제당하고 있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환경이든, 분위기든 내가 아닌 어떤 타자에 의해서 말이다. 컨트롤 타워, 사령탑이 누구냐, 무엇이냐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진다면 이 '통제'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한다. 그렇지, 자유의지를 가졌지.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 삶은 자유롭지 못한 걸까?


시간과 돈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돈이 많으면 보통 시간의 자유를 얻게 된다. 돈이 없으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부모, 환경,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원망한다. 하지만 그런 원망은 정답도 아니고,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원망한다고 신이 '그래, 힘들지 너에게 특급 행운을 줄게' 하는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을 통제해야 돈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시간만이 평등하게 만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우선 악보를 통제해야 한다. 악보를 통제하지 못하면 연주의 맛을 제대로 내는 게 아니라 악보에 끌려다녀 건반에 손가락 맞추기 급급하다. 건반을 통제하지 못해도 마찬가지다. 안 틀리는 연주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돈을 쓰는 사람은 소비를 통제하지 못하면 돈에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쓴 돈들 때문에 내 삶이 제멋대로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돈을 쓰는 동안에는 '나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유의 탈을 쓴 속박임을 모른다.


시간을 쓰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시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어영부영 짧은 한 생이 후딱 다 지나가 버린다. 뭔가를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는 말은 시간에게 통하지 않는다. 시간은 냉정하고 공평하게 무색무취로 흘러간다.


시간과 돈과 피아노와 그밖에 많은 것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통제하는 것이다. 시간과 돈과 피아노는 아무 죄가 없다. 다만 변덕스럽고 끈기 없고 괴팍하고 줏대 없는 내가 중심을 못 잡을 뿐이다.


이 거대한 우주와 세상 앞에서 우리는 큰 것을 통제할 수 없다. 당장 10분 뒤의 주식시장도 통제할 수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주식투자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어떤 주식을 살 것이냐 팔 것이냐 하는 아주 작은 결정과 행동들이다.


삶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감히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통제할 만큼 인간은 그렇게 잘났거나 똑똑하거나 끈기 있지 않다. 삶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우리는 소거법을 이용하여 삶에서 우선 아닌 것들, 불필요한 것들을 치워 버릴 수 있다. 먼지 쌓인 방을 청소하고, 케케묵은 짐을 버리고, 삶을 갉아먹는 악습들을 고치기 위해 조금씩 행동에 나설 수 있다.


'쩨쩨하게 단돈 몇 만원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야 되겠어' 하던 내가 수기 가계부를 적기 시작한다. '김형석이나 조영수 같은 작곡가가 못될 바에야 이 나이에 어설프게 작곡해서 뭐 하겠어' 하던 내가 스케일, 화성학, 피아노를 느리지만 차근차근 공부한다. '어차피 이번 생에 효도는 글렀어' 하던 내가 1년에 한 번이라도 어머니와의 여행을 계획한다.


나 외의 모든 것(타자)로부터 통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해야 할지 전략이 보인다. 악습을 이기려고 할 게 아니라 다른 좋은 습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한 풍족한 시간을 바라기 전에 우선 적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작은 시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환경을 극복하려 하지 말고 다른 환경으로 대체해야 한다.


통제하지 못하는 삶은 결국... 오호통재라... 슬퍼진다. 통제는 정복이 아니라 타협이다.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타협. 세상 모든 사람을 위로할 곡을 쓰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내 음악을 좋아해 줄 누군가를 위해 곡을 쓰면 된다. 내 피아노 실력(스킬)이 전 세계에서 몇 십억 등이라도 내 연주를 바라거나 내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나는 피아노와 작곡을 통제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비참하고 굴욕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한다.


이 작은 통제의 성공을 통한 자존감 회복은 삶의 또 다른 부분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내 인생은 글렀어' 하던 마음이 '내 인생도 가능성이 있어'로 바뀐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서 삶 전반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말을 언론을 통해 많이 듣고 보지 않았는가.


매일의 피아노 (치는) 습관 들이기가 한 달을 향해 가면서 나는 삶의 다른 부분도 좀 더 체계적으로 통제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있다. '매일 한 시간 피아노'라는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면서 나는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얻고 있다. 통제란 곧 안정감이다. 마음이 안정되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면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의욕이 샘솟는다. 그토록 무기력하던 나에게서 말이다.


낚시가 오로지 운이라고 믿는 사람은 낚싯대만 던져놓고 자기가 마치 세월을 낚는 강태공인 양 하릴없이 찌만 바라본다. '물고기가 물어줘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물고기가 입질을 하기까지의 다양한 전략 - 미끼, 찌맞춤, 포인트 등등 - 에 대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다.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월급(출근시간)에, 시간에, 남의 요구에, 대출에 끌리고 쫓겨 다니며 로또에 당첨되거나 주식이 폭등하거나 부모님의 유산을 바라며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이란 믿지 못하는 사람과 밤을 새는 것과 비슷한 상황과 기분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은가. 당신과 나는 의미 있고 자존감 있는 삶을 당연히 원한다. 작은 통제를 시작하자. 매일 노트에 메모 한 줄을 남긴다던가, 책상 위를 깨끗이 닦고 하루를 시작한다든가... 무리하고 과하게 시작하지 말고. 무리하고 과하게 시작하는 것은 지킬 수 없는 방학계획표, 빚투와 같다.


어릴 적부터 나는 통제란 단어를 매우 딱딱하게 생각했다. '독재자가 국민을 통제한다', '군부가 시민을 통제한다'처럼 부정적 이미지, 자유와 반대되는 이미지로. 하지만 어린아이가 길을 건널 때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당연히 부모가 통제해 줘야 한다. 우리 속에는 죽을 때까지 게으르고, 나태하고, 탐욕적이고, 쾌락적이고, 천방지축인 어린아이가 있다. 그 어린아이가 삶(세상)이라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해 줘야 한다. 이것이 통제다.




통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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